뜰안의 대추나무
권영상
뜰안 대추나무에 대춧잎 핀다. 유독 반짝인다. 대춧잎은 마주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마주 보는 마음을 반짝이게 한다. 세상에서 대추나무 대춧잎처럼 반짝이는 게 있을까. 수면에 부서지는 햇빛처럼 눈부시다. 해가 뜨나 안 뜨나 별나게 반짝인다.
대추나무를 뜰안에 심은 건 지지난 해 초겨울이다. 가급적 집안엔 한 식구처럼 친숙한 나무를 심고 싶었다. 감나무 같이 왜 좀 편안한, 마음씨 좋은 작은아버지 같은, 가까운 5촌이거나 7촌 당숙 같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촌수를 가진 사이처럼 친숙한. 그런 나무 중에 살구나무가 있고, 모과나무가 있다. 어린 시절, 살구나무 골목길에서 비석치기나 술래잡기를 늦도록 하다보면 어머니가 밥 먹으라고 부르셨다. 하던 놀이를 급히 마치고 집으로 달려갈 때 혼자 남아 우리가 놀던 자리를 지켜주던 살구나무.
그런 나무 중에 대추나무가 또 있다.
건넛말 대추 아재집엔 7촌나무가 있었다. 7촌나무는 대추나무인데 그게 왜 7촌나무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대추 아재네 7촌 당숙께서 그걸 심어놓고 6,25전쟁에 나갔는데 그 후로 돌아오지 않아 당숙을 대신해 7촌나무라 부른댔다. 우리들은 그저 그런가 보다 하고 7촌나무 7촌나무 했다. 그로부터 우리들은 7촌나무 대추가 아무리 맛 들어도 함부로 그 나무를 타고 오르거나 신짝을 집어던지지 않았다.
지금 내가 가끔 내려와 살고 있는 안성집 길 건너편에 대추나무집이 있다. 그 댁 마당엔 커다란, 늙은 대추나무 한 그루가 있다. 그댁 할아버지는 요즘도 만주로 달려가 독립운동을 하시는지 일 년에 두어 번 집에 올까말까다. 늙으신 할머니가 혼자 마당에 동산을 만들고 함박꽃을 피우고, 장미를 키우신다. 때로 보면 그 댁 할아버지는 함박꽃 필 때 돌아와 잠시만에 장미꽃 피면 워디로 떠나가 대추가 익을 적에 홀연히 돌아오곤 했다.
그 넓은 집에 혼자 사시다시피 하는 할머니는 그 아픔을 잊으려고 그러시는지 일요일이면 성경을 받쳐 들고 성당에 나가셨다. 성당에 가실라면 우리 집 앞을 지나야 하는데 비녀머리에 깨끗한 한복차림으로 조신조신 걸으셨다. 예전 나의 어머니를 참 고대로 닮으셨다.
가을이 깊어갈 때쯤이다.
하루는 대추나무집 할머니께서 우리 집에 들르셨다. 한손에 검정 비닐봉다리를 들고 약간 비탈인 우리 집으로 걸어오시는 걸 보고 나는 얼른 나가 제 손 잡으세요 하고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할머니는 손사래를 치며 홀로 걸어 들어오셨다. 그 연세에도 내외를 하시는 모습이 참 아름다웠다. 할머니께서 봉다리를 내게 넘기시며 말했다.
“대추 좀 땄어요. 드릴라고.”
나는 붉고 살 오른 대추를 꺼내 앞니로 딱, 하고 맛보았다. 달고 맛있기도 하지만 이렇게 남 주기에도 좋은 선물감이 대추란 걸 그때에 또 알았다.
그해 초겨울, 양재 나무시장에서 제법 나이든 대추나무를 샀다. 그걸 차에 싣고 올 때 아내가 그랬다. 내년이면 대추 먹겠네. 그렇지만 나는 내년보다는 그 훗날을 생각했다.
그 이듬해 대추나무집 할머니는 돌아오지 않는 할아버지에 진력이 났는지, 집을 청산하고 딸네 집으로 가셨다. 그 일로 어머니를 보는 듯 하던 대추나무집 할머니도 잃어버리고, 대추 아재네 7촌나무도 그만 먼 추억 속으로 날아가 버렸다.
다행인 것은 우리 집 뜰안에 대추나무가 크고 있다는 점이다. 전지를 잘 해 주어 그런지 수형이 좋고 건강하다. 어서 대추 꽃이 펴서 대추나무집 할머니처럼 이웃에게 대추 선물을 해보고 싶다.
교차로신문 2020년 6월 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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