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꽃으로 물드는 시골풍경

권영상 2020. 6. 7. 23:06

꽃으로 물드는 시골풍경

권영상

 

 

저녁 반찬거리를 사러 나섰다. 내 손안에 재난지원금 카드가 있다. 나는 차를 몰아 20여분 거리의 면 소재지에 나갔다. 시골이긴 해도 식자재 마트며 불짬뽕 음식점에 PC방까지 다 있다. 마트에 들러 반찬 장을 보아 지원금 카드를 내밀었다. 재난지원 카드는 타 시도에선 사용할 수 없단다. 시골을 위해 쓰겠다는 내 생각이 잠시 어리석었다.

 

 

내 카드로 장을 보고 돌아올 때다. 한길가의 풍경이 내 눈을 사로잡았다. 큰금계국과 꽃양귀비가 꽃물결을 이루고 있다. 갈 때에 못 보던 꽃들이 돌아올 때에야 내 눈에 들어왔다. 가끔이긴 해도 7년 동안 이 길을 다녔는데 이런 풍경은 처음이다. 산길을 구불구불 돌아가는 심심한 길이 마치 낯선 길처럼 새롭고 황홀하기까지 하다. 노랑과 빨강 꽃빛이 뜻밖에도 초록숲길과 너무도 잘 어울린다.

 

 

나는 한적한 길가에 차를 세웠다. 그리고 눈을 어리게 하는 유월의 꽃 선물 사이에 들어섰다. 아무렇게나 꽃씨를 뿌려놓은 것처럼 자연스럽게 피어 있는 모습이 이국적이다. 요 몇 해 전에 보았던 스페인 발렌시아에서 그라나다로 가는 고속도로가 떠올랐다. 버스는 끝없이 펼쳐지는 올리브나무 들판과 낮은 구릉을 지나고 있었는데 그 단조로운 전원을 달콤하게 해주는 것이 있었다. 꽃양귀비였다. 일부러 꽃씨를 뿌려 키운 것처럼 꽃양귀비는 끝 모를 들판과 구릉 너머로까지 붉게 흩어져 피고 있었다. 마치 인상주의 화가의 그림 속을 들어가는 듯 이색적이고도 화려한 풍경이었다. 그때에도 고속도로가 가까운 주변에는 노랑 금계국이 펴 있었다. 그들 풍경은 스페인의 고풍한 유적들만큼 내 머릿속에 지금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근데 오늘 그 풍경을 우리네 시골 길에서 만나게 될 줄이야! 강변이나 국도변에 곱게 핀 이들 꽃 풍경은 더러 인터넷에서 본 적이 있지만 이렇게 한적한 시골 산 구빗길에서 그들을 만날 줄은 몰랐다.

다들 알고 있겠지만 이들은 본디 서양에서 들여온 관상용인데 화원을 뛰쳐나와 우리나라 들판 전역으로 서식지를 넓혀나가고 있는 외래종이다. 그런 까닭에 이들을 탈출외래종이라 한다. 동물에 비한다면 베스나 황소개구리 같은 종이다. 번식력이 강해 고유종의 서식지를 빼앗거나 생태를 교란하는 걸로 알려졌다. 이웃 몇몇 나라에선 이들의 급속한 번식을 우려해 퇴치하는 모양이다.

 

 

이쯤 되고 보면 적막했던 농촌을 곱게 물들이는 이들 꽃이 '미운 꽃'이 되고 만다. 유월의 농촌이라면 울담 앞에 접시꽃이 피어있거나 돌각서리에 패랭이꽃이 피어있어야 한다. 그런 풍경을 떠올리며 차를 몰아 논벌 사잇길로 우회전을 할 때다. 이번엔 길 양편이 파란 잉크빛 꽃물결로 일렁인다. 이 오묘한 푸른 꽃 이름을 몰라 지난번엔 답답했는데 기어코 알아냈다. 알 만한 이라면 알고 있을 수레국화다. 가끔 글에서 읽은 적이 있었지만 그 글의 수레국화가 등장하는 배경은 넓은 하천이거나 노지였다.

 

 

시골의 논둑길이 파란 수레국화 때문에 갑자기 신비로워진다. 마치 파란 얼굴에 파란 몸을 가진 스머프들의 비밀의 마을을 찾아들어가는 기분이다. 욕심 많은 인간 가가멜을 두려워하는 그들만의 은밀한 숲.

차를 몰아 몇 집 안 되는 마을로 들어선다. 마을 깊숙한 곳까지 꽃양귀비와 큰금계국이 찾아들어 피고있다. 드디어 집에 다 왔다. 차를 세우고 장 본 걸 들고 내린다. 우리집 뜰안에도 조용히 찾아 들어온 그들 꽃이 나를 반긴다. 생태계 교란종이라는 이유로 그 몇 안 되는 꽃포기를 틀어쥐고 뽑아버리기엔 꽃이 너무 예쁘다. 

 

교차로신문 2020년 6월 1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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