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한 시골 개들
권영상
봄이 무르익어 가고 있다. 사람만 봄인가. 세상 모든 만물들에게 다 봄이다.
오늘 점심 무렵이다. 동네 개들이 마을을 발칵 뒤집어놓았다. 시골은 집집마다 개를 키우는 편이라 합세하여 짖어대는 울음 기세가 폭풍 같았다. 건너편 야산 기슭에 출현한 흰개가 문제였다. 동네 개들을 뒤집어지게 만든 그 놈은 수캐다. 그리고 그들의 울음 잔치 배경엔 무르익어가는 봄이 있었다.
흰개는 마을에서 짖어대는 개들의 속내를 너무도 잘 아는 노련한 놈이다. 저번에도 그랬듯이 그는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 수 있는 건너편 산 기슭에 나타나 얼씬댔다. 올 거면 오고 갈 거면 가는 게 아니었다. 마을 개들을 애태우느라 산자락을 타고 내려올 듯 말 듯, 제 모습을 슬쩍 드러냈다가는 다시 숲에 몸을 숨기고, 그러며 개들 애간장을 태웠다.
흰개는 발정나 있었다. 산 너머 어디다 거처를 두고 동네 개들의 마음을 메어쳤다 엎어쳤다 하러 오는 놈이다. 그 놈은 그런 식으로 마을 개들의 마음을 잔뜩 부풀려놓고는 가버렸다.
그 녀석이 오늘 또다시 점심 무렵에 슬그머니 나타났었다. 요 몇 집 안 되는 집 앞 동네엔 덩치가 큰 외국종 개가 한 마리, 가끔 우리 집에 와 내 신발을 물어가는 털개, 최목수네 누렁 삽살개 두 마리, 지난겨울에 50대 부부가 이사 온 ‘무조건집’ 누렁 쌀개가 있다. 당신이 부르면 무조건 달려갈 거야를 오후쯤이면 앰플리어로 꽝꽝 틀어대는 무조건집 쌀개도 작지만 짖었다 하면 소름 끼칠 정도로 앙칼지다.
어쨌든 무르익어가는 봄 때문에 시골 개들이 안달 났다.
흰개는 이번에도 그렇게 마을 개들의 마음을 달뜨게 해놓고는 산을 넘어 영영 가버렸다. 흰개가 가고난 뒤부터 부슬부슬 비가 내렸다. 텃밭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왔다. 비 내리는 오후, 뜨거운 라면 생각에 물을 올려놓을 때다.
“이런 나쁜 놈의 개가!”
당신이 부르면 무조건 달려갈 거야집 주인사내 목소리가 덜컹 났다.
뭔 일인가 하고 내다봤다. 그 집 안 마당에서 개 두 마리가 비를 맞으며 흘레붙고 있었다. 마을 개들의 애간장을 태우던 그 흰개였다. 그 놈이 연두색 쇠망으로 둘러친 그 집 울타리를 넘어들어가 묶여있는 앙칼진 개를 건들었다. 빗자루를 들고 개를 을러대는 그 집 사내를 보다가 나는 얼른 창문을 닫았다.
다 끓은 라면을 앞에 놓고 한 젓가락 집는다.
텃밭에 산미나리 씨앗을 뿌려놓고 기다릴 때다. 자고 나가보면 누가 씨앗 뿌린 곳 여기저기를 옴푹옴푹 파놓았다. 고양이 짓이야, 개 짓이야 하며 묻고 돌아서면 다음 날 아침, 또 고만한 구덩이가 옴푹옴푹 나 있었다.
그게 개들의 짓임을 옆집 수원 아저씨를 통해 알았다.
개가 흙속 굼벵이를 잡아먹느라 그렇게 해놓는다는 거다. 흙속에 숨어사는 느린 굼벵이의 움직임을 개가 보아내거나 들어낸다는 거다. 놀랍지 않은가. 개가 땅속을 들여다 보다니! 아무도 없는 캄캄한 골목 구석을 보고 개가 짖는 건 거기에 벌레 한 마리쯤 움직이고 있는 걸 보기 때문이라는 거였다.
그게 개였다. 본능에 충실한 시골 개들. 도시 견공들에게도 그런 본능이 남아 있는지 모르겠다. 주인의 가슴에 안겨 세련된 생활 예절을 배우러 학원을 전전한다는 도시 견공들. 그들에게 시골 개들의 건강한 이 이야기를 전한다. 그리고 자꾸 나약해져가는 도시 인류에게도.
교차로신문 2020년 5월 2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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