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백이 피는 섬에서 향일암까지
권영상
지난해 3월 31일이었다. 어딘가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자꾸 일었다. 갇혀사는 오랜 겨울 때문이러니 했다. 이럴 때는 문득 행장을 꾸려 나, 다녀오리라, 하고 길을 나서는 게 사내다운 모습이다. 그러나 그러기엔 내 길눈이 어두웠고, 내비게이션 이용도 서툴렀다. 결국 마음 내켜하지 않는 아내에게 동행을 부탁했다.
그러느라 가고 싶었던 경주 남산을 포기하고, 아내가 좋도록 동백 꽃섬을 찾아가기로 했다. 쉽게 양보한 까닭이 또 하나 있었다. 승용차로 아내와 함께 여행하는 친구들이 실은 부러웠던 거다. 결국 우리의 행선지는 여수 오동도로 결정되었다. 스무 살 무렵, 강릉에 살던 나는 남도의 섬이 그리웠다. 파도와 싸우는 외로운 섬. 시골 청년의 앳된 순정을 안고 그 무렵 찾아간 곳이 여수였다. 그때 내 기억에 오동도 동백이 참 고왔다.
나는 그 기억을 가지고 3월의 마지막 날, 차를 몰아 남으로 출발했다.
험난한 초행길을 달려 마침내 여수에 이르렀다. 우리가 생각해도 부부여행의 초보자인게 분명했다. 347 킬로미터의 먼 길을 단숨에 달려갔던 거다. 순천쯤에서 하루를 쉬고, 그곳의 풍광을 즐긴 뒤 여유있게 가도 될 일이었다. 그런 우리를 보고 우리는 웃었지만 우리가 살아온 게 그랬다. 목표를 정하면 쉬지않고 질주했다.
우리는 오동도부터 찾았다. 멀지 않아 해가 질 늦은 오후였다. 3월의 거친 바람을 맞으며 찾아간 섬 입새에서부터 우리는 비명을 질렀다. 꽃도 꽃도 그 야단스레 피어있을 줄은 정말 몰랐다. 천지가 동백꽃이었다. 붉게 타는 노을과 짙붉은 동백꽃과 3월이 함부로 어우러져 말 그대로 절정이었다. 낙화를 밟을까봐 발 한 뼘 어디 내디딜 틈이 없었다.
“함께 오기 너무 잘했네!”
아내가 감격에서 헤어나지 못할 때는 이미 날이 어둡고 있었다.
동백꽃에 반했는지, 하룻밤을 자고 난 아내 마음이 달라졌다. 여기까지 온 김에 향일암도 가 보자고 했다. 40분 거리. 돌산도 끝 금오산 중턱에 그 절이 있었다. 동백나무 숲길로 난 산비탈 길을 걸어 암자에 들어섰다. 우리는 거기 계신 부처님께 우리가 여기까지 무사히 온 것에 대한 감사와 부처님의 건강과 딸아이를 위해 축원을 올렸다.
그리고 나무 밑 그늘에 앉아 눈앞에 펼쳐진 망망한 남녘의 바다를 바라볼 때였다. 난간에 쭈욱 돌아가며 걸려있는 소원을 적은 쪽지들 중의 하나가 문득 내 눈에 들어왔다.
“우리 아빠 아프지 않게 해주세요.”
어린 아이의 글씨였다. 처음엔 참 기특하구나, 했다. 그런데 자꾸 우리 아빠 아프지 않게 해달라고 내게 하소연하는 것 같았다. 머릿속이 풀잎처럼 흔들렸다.
“하룻밤 숙박비 여기 내놔.” 나는 아내에게 손을 벌렸다.
여유있게 내려왔다면 순천쯤에서 쓰고왔을 숙박비를 여기에 쓰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우리는 다시 부처님을 찾아들어가 그 아이 아빠의 쾌유를 오래도록 빌었다. 그런 까닭일까. 세상이 더 넓어 보이고 대해가 품에 들어오는 것처럼 아늑했다.
돌아보니 이 쪽지를 만나기 위해 겨울동안 나는 먼 바깥이 그리웠고, 경주 남산으로 갈 행선지를 바꾸어 동백을 보러 오동도로 왔다. 동백꽃에 반한 일이며 우연히 이 화엄사의 말사를 찾아온 일도 인연이 있다면 있는 듯 지나온 날이 아득했다.
그날은 허둥대며 올라가는 대신 바다가 보이는 둔덕에 올라 쑥을 캐고, 이튿날 차에 올랐다. 그 아이의 아빠는 자식이 걱정하지 않아도 될 만큼 몸이 다 나았는지......
<교차로 신문> 2020년 4월 3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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