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장님, 사장님
권영상
“조 사장! 감자밭 비닐 피복 벗겨졌던데 가 봐야할 것 같아.”
삼거리 파란 대문집 주인을 보고 트랙터를 몰고 가던 이가 소리친다.
“고맙수다. 김 사장님!”
그집 아저씨가 그를 향해 손을 흔들어 보인다.
나는 폐비닐장에 빈 퇴비포대를 가져가느라 길을 재촉했다. 봄에 퇴비 5포대, 여름에 2포대. 조그만 텃밭이지만 1년에 7포대의 퇴비거름을 쓰는 편이다. 그걸 안고 가면서도 내 귀에 거슬거리던 말이 자꾸 떠오른다. ‘사장님’이라는 호칭이다. 농사짓는 분들이라고 사장님 호칭을 왜 못 쓸까만 너무 안 맞는 느낌이다.
요즘은 사장님이라는 호칭이 대세다. 남녀를 불문하고 아무에게나 대놓고 쓰는 말이 사장님이다. 근데 사장님! 사장님! 하는 말을 들을 때면 좀 불편하다. 학장님이라거나 총장님이라면 또 모를까 개인적으로 볼 때 ‘사장님’이라는 호칭은 별로다. 아직 내 귀에 익숙하지 않아 내게만 모나게 들리는지 그건 모르겠다.
주말마다 오르내리긴 하지만 서울에서 한 시간 거리인 여기까지 와 산지 벌써 7년째다. 그때, 이웃에 먼저 와 살던 나와 비슷한 연배의 사내가 있었다. 살집이 좋고 별나게 사회성이 빼어난 이었다.
그는 나를 부를 때면 매양 ‘사장님’이라 했다. 교직에서 물러난, 이를테면 세상물정이라고 모르는 순진한 사회 초년생이던 나는 그 호칭이 대뜸 귀에 거슬렸다. 사장이란, 이익 추구를 목적으로 설립한 회사의 수장이다. 아무리 아니라 해도 자본주의 냄새를 짙게 풍기는 이가 바로 그다. 이익이 나는 곳이라면 제일 먼저 손을 내뻗고, 필요하다면 사원을 퇴출시키는 이도 그다. 나는 그런 사장이 된 적도 없거니와 꿈꾼 적도 없는 사람이다.
“제발 저 보고 사장님, 사장님 하지 말아주세요.”
나는 그에게 사정하듯 양해를 구했다. 그러자 그가 그럼 뭐라 부르면 좋겠냐고 했다. 나는 대뜸 ‘아저씨’라 불러달라 했다. 아저씨는 친근한 호칭이다. 어릴 적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내 고향에선 삼촌이나 당숙은 물론 이웃 남자들에게 두루 쓰는 호칭이 아저씨다. 아저씨란 가족이나 친지가 아니어도 가족같이 품어주는 따뜻한 호칭이다.
“암만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아저씨라.....”
그러면서 자신이 대기업에서 이사로 있었다면서 자신을 박 이사님이라고 불러 달랬다. 나는 그러마고 했지만 한 번도 그를 박 이사님이라고 부른 적이 없다. 그가 이사였는지 아닌지도 모르지만 사장님이니 이사님이니 하는 그런 말 문화가 싫었다. 자신을 경제적 신분으로 드러내려는 욕망이 특히 마음에 거슬렸다.
그는 2년을 이웃으로 살다가 어딘가에 또 다른 집을 지어 갔는데 나이에 걸맞지 않게 ‘부자 되세요’ 라는 말도 즐겨썼다. 내게도 그 말을 곧잘 썼다. 텃밭을 조금 짓고, 힘에 맞게 글 쓰는 내가 부자되고 싶을 일이 뭐가 있을까. 돈이 세상의 중심이고 주인인 시대에 살다 보니 인사까지 돈 냄새를 풍긴다.
한 때 김첨지라 불리던 호칭이 김진사가 되고 양반제가 무너질 때쯤 너도나도 양반이 되고, 또 한 시절 지나서는 김 박사니 김 선생님이니 불리다가 지금은 김사장님이 되었다. 사장님이라 부르는 배경엔 나도 사장님으로 불려지고 싶다는 자본주의 욕망이 숨어 있다. 정겨운 호칭인 아저씨도 한때 쓰이다가 사라지는 유행어 같아 아쉽다.
<교차로 신문> 2020년 4월 1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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