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우체통 안의 봄의 기적

권영상 2020. 4. 24. 11:27

우체통 안의 봄의 기적

권영상

 

 

 

 

뜰 안에 나무가 여럿 있다. 그런 까닭에 새들 왕래가 잦다. 주로 박새 아니면 곤줄박이다. 마을을 지나가다가 잠깐씩 들러 노래부르며 놀다 떠나고 싶을 때면 떠난다. 그들은 아무 연고도 없는 우리 집을 찾아와 저만치 오는 봄을 알려주기도 하고, 집안의 고적감을 깨뜨려주거나 집을 비우면 찾아와 빈 집을 보아주기도 한다. 그런 일들이란 실은 얼마나 자연스러운 건지 그들이 오가는 것을 모를 정도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우체통을 세운 나무기둥이 흔들거려 돌조각으로 여기저기 틈을 찾아 박아주고 일어설 때다. 저쯤 배롱나무에 앉은 곤줄박이가 내 눈에 띄었다. 그의 행동거지가 이상했다. 오면 오고 가면 가나 보다 하던 그런 무심한 모습이 아니었다. 왠지 내 눈에 어색해 보였다. 마치 나 때문에 안절부절 못하는 그런 모습이었다.

‘아니 저게 왜 저러는 거지?’

 

 

그 일이 있고, 점심을 먹을 때 아내가 입을 열었다.

“우체통에 뭐라고 한 자 써 붙여야겠어요.” 했다.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는 내게 아내가 한 마디 더 덧붙였다. 우체통에 새가 둥지를 틀었다는 것이다. 참 예민한 게 여자의 눈이다. 엊그제 안성에 내려온 아내가 단박에 뜰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곤줄박이의 비밀을 눈치 챘다. 그제야 나는 아! 하고 때늦은 탄성을 질렀다. 곤줄박이의 그 안절부절 못하던 바장거림이 우체통 때문이었다.

그 말을 듣고 나서 보니, 그제야 내 눈에 곤줄박이가 다시 보였다. 마당가에 세워둔 우체통을 자연스럽게 드나들고 있었다. 어제도 그러고 그끄제도 그랬을 텐데 나는 그걸 모르고 우체통을 바로 세우느라 소란을 피웠다.

 

 

그래도 호기심이 있어 우체통을 곁을 지나며 슬쩍 보니 우편배달부가 언제 왔다갔는지 편지 한 통이 꽂혀있다. 알을 품는데 방해가 될까봐 얼른 뽑으며 그 안을 들여다봤다.

둥지 안에 하얀 알이 여섯 개.

비밀을 훔쳐본 것처럼 가슴이 쿵쿵거렸다.

시골집 우체통에 곤줄박이가 둥지를 틀고 새끼를 친다는 말은 가끔 들었다. 하지만 그 일이 우리 집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게 놀라웠다. 마치 큰 선물을 받은 느낌이었다. 이 계절이 우리 집에 보내준 크고 짜릿한 봄 선물.



고향집에도 봄이면 제비가 왔다. 논갈이가 한창이고, 남녘 따스한 담장 밑에 호박이 떡잎을 펼 때다. 그때 날아온 제비는 작년에 떠나간 그 제비가 아니라해도 반갑기만 했다. 제비가 날아오지 않는 집을 생각하면 고향집에 찾아온 제비는 선물 중에도 크고 빛나는 선물이었다.

나는 서둘러 작은 간이 우체통을 만들었다. 그쯤이야 어렵지 않다. 잘 만든 건 아니지만 지금 서 있는 우체통도 내 손으로 만들어 마당가에 세운 거다. 망치소리에 곤줄박이가 놀라지 않게 조용히 만들어 우체통 곁에 세웠다. 그리고 ‘편지는 제게 주세요. 곤줄박이가 출산 중입니다’ 라고 써 붙였다.

 

 

방에 들어와 인터넷을 열었다. 곤줄박이 알은 품은 지 13일이 지난 후에 부화하고, 부화한지 15일 뒤면 날아간다고 했다. 지난해에도 창가 으름덩굴에 오목눈이가 둥지를 틀고 새끼를 쳤었다. 창문 열 일이 있어도 열지 못하고 크게 할 말 있어도 숨죽여 말하며 살았지만 그게 불편이기보다 오히려 설레는 행복이었다.

이제 앞으로 한 달. 우체통 안의 봄의 기적을 배워 내 안의 기적으로 살려내고 싶다.

 

 

 

교차로 신문 2020년 5월 2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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