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새별오름, 이보다 멋진 풍경

권영상 2024. 12. 14. 18:33

 

 

 

새별오름, 이보다 멋진 풍경

권영상

 

 

오늘이 제주 여행의 마지막 일정이다.

송악산과 대정 오일장을 둘러보고 제주공항으로 가는 길에 곶자왈 도립공원과 새별오름을 들르기로 했다. 좀 무리지 싶었다.

웬걸, 아침에 차로 이동하면서 삼방산에서 송악산까지 걸어가기로 한 사계 해안 길을 포기했다. 어제 카멜리아힐의 동백꽃 길을 너무 많이 걸은 탓이다. 사계 해변 대신 송악산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잠깐 송악산을 걸어 오르기로 했다.

절벽에 일제가 남겨놓은 해안 진지와 산기슭 진지를 만났다. 해가 들지 않는 북향 탓인지 절벽에 남아있는 상처들이 음울해 보였다. 우리는 역사의 아픈 흔적을 한번 들여다보는 것으로 뒷사람의 소임을 다한 것인 양 부끄러움 없이 돌아내려 왔다.

 

 

차를 몰아 모슬포항을 바라보며 대정 오일장에 들렀다.

대정리 오일장은 1일과 6.

마침 우리가 찾은 날이 11일이었다.

아내는 몇 가지 제주 산물을 고르고 난 뒤 택배 배송을 부탁하였다. 돌아나오는 길에 제주 할머니들이 가지고 나오신 제주 방풍, 시금치, 냉이 등속을 가지가지 샀다. 그렇게 장터를 도느라 점심 대신 호떡, 갓 삶아낸 살찐 옥수수, 도넛을 먹는 걸로 점심을 때웠다.

갈치조림 타령을 하던 아내도 군말 없이 차에 올랐다.

 

 

일정의 마지막 날은 암만 안 그런다 해도 서둘게 된다.

곶자왈 도립공원을 내비게이션에 찍을 때 아내가 내 손을 막았다.

시간이 남더라도 곶자왈 포기하고 그냥 새별오름으로 가.”

렌터카 입고 시간에 대느라 허겁지겁하던 지난겨울을 떠올렸다.

그러자고.”

나이를 먹을수록 아내 말에 순종적으로 변해가는 내가 신비롭다.

 

 

오후 2시경 새별오름 주차장에 다다랐다.

커다란 주차장에 주차 차량만도 마흔 대가 넘었다. 많은 이들이 남쪽 방향 오름길을 오르고 있었다. 오름 위에 오른 이들의 모습이 개미만 해 보일 정도로 높다. 해발 고도 519.3미터.

신발 끈을 조이고 남쪽 방향 오름길에 들어섰다.

대충 보기에도 경사면이 60도는 될 성싶다. 계단 길이 아니라 야자 매트 위에 굵은 로프를 잘라 미끄러지지 않게 가로로 보폭에 맞게 박아 놓은 길이다. 아내와 나는 그 로프 길을 밟아 올랐다.

길 오른쪽은 키가 쪽 고른 낮은 억새 숲. 왼쪽은 떡갈나무류들이다. 중간중간 화재진압용 물 펌프가 설치되어 있었다. 정월 대보름쯤 억새 숲을 태우는 들불 축제가 여기서 시작되었다는 말이 떠올랐다.

우리는 쉬고 오르기를 무수히 반복했다. 지지난해에 오른 다랑쉬오름은 지그재그식 오름길이었는데 이번 길은 가파른 직선형 길.

 

 

이제 오름은 다시 안 갈 거야.”

아내가 무릎 고충을 호소했다.

그러나 오름의 정상은 늘 멋지다.

새별오름표지석에 기대어 사진을 남기고 풍경을 바라본다. 근처에 있는 거대한 풍력발전기가 눈에 들어온다. 그 너머 멀리 한림읍과 바다에 우뚝우뚝 들어선 풍력발전기들.

그리고 새별오름 주변의 수많은 오름들. 가메오름, 누운오름, 괴오름, 북돌아진오름, 안천이오름, 도래오름.... 제주의 오름이 360여 개라고 한다. 오름이 탄생하던 그 무렵의 지각변동이 눈에 선하다.

 

 

새별오름의 멋진 풍경은 동쪽으로 내려가는 길이 아닐까 싶다. 이쪽은 남쪽 길과 달리 키를 넘는 억새들이 가득하다. 제주 바람에 사각거리는 마른 억새 소리, 민둥한 오름의 비탈과 완만한 곡선, 그리고 가득 떠 있는 조각구름들, 구름 뒤에 은은히 얼비치는 오후의 태양. 그것들이 어우러져 내는 모습이 신비롭다.

세상에서 이보다 멋진 풍경은 못 본 것 같네요.”
내 곁을 지나가는 나이 지긋한 분이 말했다.

그분도 나처럼 풍경이 만들어내는 모습에 감동한 모양이다.

 

 

그 무렵 구름이 흩어지면서 한라산 정상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불현 드러난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드러난 눈 덮인 한라산 정상에 도취되어 우리는 한참 동안 서 있었다.

반쯤 내려오다 말고 돌아서서 새별오름을 올려다 본다.

완만한 오름의 곡선 어느 어름에 떠 있을 샛별을 상상해 본다. 새별오름은 저녁 하늘에 샛별과 함께 외로이 머물러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란다. 그게 바로 이쪽, 수많은 오름 중에서도 새별오름이 제일 우뚝한 까닭이다.

정말 오기 너무 잘했어!”
다시는 오름은 안 가리라던 아내가 휴대폰 카메라를 놓지 못한다.

 

 

주차장으로 내려오기까지 족히 1시간은 걸렸다.

오름길에서 듣던 억새 소리와 그 둥그스름한 오름의 곡선과 잔잔히 깔려있던 환한 구름들, 정상 위 하늘을 날던 날가마귀와 새매, 그리고 구름을 열치고 나오던 한라산 봉우리.......

그들을 두고 다시 차에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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