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혀 끝에서 온다
권영상
마당에 길고양이가 눈 똥을 치우고 있는데 어휴, 하며 옆집 수원아저씨가 뭘 한 상자 들고 오신다.
"안녕하세요? 뭘 이렇게 안고 오세요?"
추석 명절 쇠고 수원 아저씨를 오는 처음 뵙는다.
우리는 명절이 가까이 오면 그 전에 명절 선물을 서로 주고 받아왔다.
그러고 오늘 처음 안성으로 내려왔다. 추석 연휴가 지난 뒤라 명절을 깨끗이 잊고 내려왔는데 수원 아저씨는 그 동안 내게 뭘 더 주실 것들을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조금 더 드리고 싶어서요.”
데크 난간에 들고온 상자를 어휴, 하며 올려놓았다.
봉지째 따오신 포도다.
“예. 포도 좀 하고요. 산책하며 주운 밤 좀 하고, 포도밭에 심은 땅콩. 요 얌전한 봉지 속이 궁금하시죠? 짧은 제 실력으로 키운 배 두 알이에요.”
수원 아저씨와 옆집 사이로 같이 산 지 8년째다.
수원서 공직에 계시다가 퇴직을 하고 이 근방에 있는 친구의 포도밭을 혼자 맡아 그 일을 소일삼아 하신다.
말이 쉬워 포도밭이지, 포도밭 일이 얼마나 힘든가. 포도를 키우는 별 기술조차 없었으니 처음 몇 해는 포도밭에 매달렸으나 수확이 없었다. 그렇게 몇 년을 하면서 터득한 게 몸에 맞게, 라는 거다. 아무리 급해도 나이에 맞게 일하는 법을 배웠단다. 내가 올해 농사 잘 되셨나요? 하고 물으면 그냥 되는 대로 잘 됐어요, 라는 대답도 그렇게 해서 얻어진 거란다.
요즘은 포도나무가 늙고 병들자 반쯤 뽑아내고, 거기다 키우기 쉬운 고구마, 호박을 심었다고 했다.
봄이 시작되는 4월부터 수원 아저씨는 바쁘다.
아침을 먹고 마당에 나서면 수원 아저씨 내외분이 오토바이를 타고 요 앞 길을 지나간다.
“내려오셨군요? 밭에 갑니다!”
나보다 한 살 적다는 이유로 볼 때마다 먼저 인사를 하신다.
“잘 다녀오세요!”
나는 이쯤에서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를 드린다.
그러면 수원 아저씨 내외분은 멋진 한 몸이 되어 계절 속으로 달려간다. 거기 농막이 따로 있어 쉬고 싶으면 거기서 쉬고, 낮잠을 자고 싶으면 거기서 자고. 그렇기는 해도 농사를 잘 지어야 마음이 넉넉하실 테니, 부지런을 떠신다.
나는 받아둔 포도를 냉장고 야채통에 차곡차곡 넣는다. 그리고 땅콩과 밤과 배는 내일 서울로 갈 가져갈 거다.
요새 알밤철이다. 안성으로 오기 전엔 아침을 먹으면 하루도 빼지 않고 우면산을 오르내린다. 며칠 전이다. 산중턱 언덕을 오르는데 오솔길에 빨간 알밤 한 톨이 눈에 띄었다. 너무도 반가워 알밤을 줍고는 공중을 쳐다봤다. 거기 높은 밤나무 가지에 밤송이가 드문드문 보였다. 나는 밤나무 아래를 한 바퀴 돌았다. 밤 세 톨을 주웠다.
다음 날 아침 역시 어제 그쯤에서 밤나무 밑을 두리번거렸다. 그 날은 열 개를 주웠다. 빨갛고 탐스럽고 윤기가 반지르르 하다.
오다가 나무가 덜한 수풀에 밤 세 톨을 던졌다. 청설모가 웬떡! 하고 찾아먹게 하든가, 아니면 아이코나 살았네! 하고 봄에 밤싹이 나오게 하든가 하려고.
오늘 아침에 나는 그쯤에서 또 밤나무 밑을 두리번거렸다.
두 톨을 주웠다.
어제 주운 열 개를 생각하려니 슬그머니 욕심이 일었다. 나무를 흔들어 보려고 내 발이 밤나무 쪽으로 걸어갔다. 나는 놀라 발길을 돌렸다.
나무가 덜한 수풀에 밤 두 톨을 다 던졌다. 내 욕심을 던지듯.
근데 오늘 안성에 내려와 내가 던진 밤을 수원 아저씨로부터 되돌려 받았다.
내가 사는 마을 지명은 밤고개길이다. 옛 지명은 율곡리.
12년 전 내가 내려왔을 때 야산은 온통 밤나무 천지였다. 밤꽃 냄새가 진하게 풍기는 밤이면 밤꽃내에 취해 길고양이들이 음란하게 교성을 질러댔다. 그런 때문인지 밤골의 밤나무는 해마다 다산이어서 한 번 나가면 밤 한 가방은 거저 먹기였다.
그 일을 수원 아저씨가 요새 하시는 모양이다.
내일 서울 올라가면 우면산에서 주운 밤과 여기 밤고개길 밤 맛을 좀 봐야겠다.
가을은 혀 끝에서 오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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