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의 폭설
권영상
간밤에 아내를 서울로 보내놓고 잠을 설쳤는데 자고나니 뜻밖에 눈이 오네요.
세상에! 아직 11월인데, 11월의 첫눈치고 느닷없이 왔고, 그 양도 많네요. 나는 창문을 열어놓고 우두커니 눈을 내다봅니다.
길 건너 고추밭이며 마을 집들, 한때 무성하던 나무들이 이미 눈 속에 다 묻혀버렸네요. 데크에 쌓인 눈을 보아하니 10여 센티는 될 것 같습니다.
아직 설레는 마음이 있어 휴대폰 카메라로 눈 풍경을 찍어 아내에게 보내고, 지인들에게 선물인양 보냈지요. 달려간 카톡은 이내 기쁘게 돌아왔죠. 그쪽에도 지금 한창 눈이 내린다는 소식입니다.
아침을 먹고 다시 창문을 여니 상황이 돌변했습니다.
치고 들어온 눈이 친 만큼 또 쌓였습니다. 펄펄이 아니라 펑펑입니다. 하늘이 점점 검어지며 침묵이 깊습니다. 눈이 얼면 차 문이 열리지 않는다는 아내 전화를 받고 나가 차 위에 얹힌 눈을 치며 보니 눈이 정강이에 차오릅니다.
자칫하다간 이 시골에 갇히고 말겠다는 불안감이 스칩니다.
5,6년 전, 그때만 해도 폭설이 내리면 집을 빠져나가지 못했지요. 집 뒷길은 언덕인데 그때 내가 몰던 후륜구동 승용차는 미끄러운 경사면에 취약했습니다. 결국 갈 길을 포기하고 눈이 다 녹은 뒷날에야 집을 빠져나갔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걱정 없습니다.
이런 때를 대비해 4륜구동으로 바꾸었네요.
가을걷이 끝이라 고구마가 조금 있고, 서리태 콩도 조금 있고, 토란이며 갈볕에 말린 가지 오가리며, 아내가 간장물에 담가놓은 아삭 고추가 두어 병, 요 며칠 전에 담가놓은 무김장도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내가 느긋해지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먹을 만큼 먹은 나이 때문입니다. 어떻게 된 게 나이를 먹으려니 호기심이 줄어드네요. 패배나 실수에 대한 부끄러움도 두려움도 줄어들고요. 느는 것이라곤 대책 없는 느긋함입니다. '길이 막히면 119 부르지 뭐.' 이런 배짱이 생기네요. 예전엔 119가 집에 온다는 일 자체가 부끄러웠는데 내가 달라져도 너무 달라졌습니다. 아마도 마음대로 따라주지 않는 늙은 몸 때문에 생기는 느긋함 같습니다.
글을 마무리하지 못하고 하룻밤을 또 자고 났습니다.
일어나자마자 혹시나 하고 창문을 엽니다.
나는 입을 딱 벌렸네요. 눈이 뜰안에 가득 차올랐습니다.
뜰 마당 꽃복숭아 나무가 눈 무게에 짓눌려 반쯤 휘어져 있습니다.
저렇게 두면 안 되겠다 싶어 옷을 챙겨 입고 나가 나무를 흔들어 눈을 털어주었지요. 대추나무, 모과나무도 눈덩이에 짓눌려 구부정합니다. 그걸 흔들어주러 다니며 보니 눈이 허벅지까지 차오릅니다. 어림짐작으로 50센티는 넘게 온 것 같습니다. 지붕을 쳐다보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한길은 쌓여 있습니다.
‘이러다 집이 무너지겠다!’
그런 생각이 퍼뜩 들었습니다.
느긋하던 마음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집니다. 사다리를 놓고 지붕에 올라 눈을 밀어 내렸습니다. 아래에서 눈덩이 굴러 떨어지는 소리가 쿵쿵쿵쿵 요란합니다. 잔뜩 물을 먹은 눈이라 껴안고 굴리는데 너무 무겁습니다.
문제는 그러는 이 시간에도 쉬지 않고 눈이 펑펑펑 내린다는 겁니다.
모바일 뉴스엔 오늘밤 자정을 지나 새벽 1시까지 눈이 내리기로 예정돼 있다고 합니다.
대충 눈을 정리하고 내려왔네요.
가만히 생각해 보려니 용인, 이천, 여주가 쌀의 곡창지대이며 예로부터 진상미로 유명한 까닭을 알겠습니다. 용인이 가까운 이곳에 한 10여년 살아보며 느끼는 것이 이 지역에 수량이 풍부하다는 점입니다. 유별나게 비가 많고 눈이 많은 이곳은 농업이 발달한 경기남부 지역입니다.
얼른 해가 나 이 눈 다 녹고, 집으로 돌아갈 길이 열렸으면 좋겠습니다.
점심엔 몸도 풀 겸 따끈한 라면을 한 그릇 먹어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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