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맛비를 기다리는 이들
권영상
장마철이다. 해가 나면 폭염이 걱정이고 장마가 지면 줄기차게 내리는 장맛비가 걱정이다. 장맛비 때문에 새로운 걱정거리가 하나 생겼다. 대추나무다. 나무시장에서 큼직한 대추나무를 사다가 심은 지 3년. 그때까지만 해도 몰랐다. 대추나무쯤이야 그냥 심어두면 대추가 열리는 줄 알았다. 우연히 유튜브에서 대추나무 전지법을 배웠다. 그대로 전지를 한 탓일까. 대추 열매가 오종종하게 열렸다. 물론 볕도 좋았고, 비도 알맞추어 왔다.
“대추 한 가마는 따겠구나!”
나는 대추나무에게 실없는 농을 했다.
근데 하늘이 내 농을 들었을까. 시샘하는 게 분명했다. 좀만 비 내려도 대추나무가 비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더니 끝내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우듬지 쪽 새 가지들이 성하긴 너무 성했다. 비 내리면 나는 임시방편으로 대추나무를 흔들어 빗방울을 떨어뜨렸다. 무성한 가지를 솎아주고 싶지만 솎으려니 오종종한 열매가 아까웠다.
철모르는 농사꾼의 과욕이 부른 걱정이 아닐 수 없다.
걱정은 걱정이라도 장마철은 와야 하고, 장맛비는 내려야 한다. 장맛비를 기다리는 생명들이 좀 많지 않은가. 물웅덩이에 사는 개구리밥이며 거기 갇혀사는 물고기들이 있다. 그들에게도 꿈이 있다. 불어넘치는 웅덩이 물을 타고 보다 큰 세상으로 나아가야 한다. 언제까지나 이 좁아 터지는 물웅덩이에서 살 수만은 없다. 그들만인가. 장맛비를 간절히 기다리는 건 뭐니 뭐니 해도 버섯들이다. 그들은 일 년 내내 땅속에 숨어살면서 장맛비를 기다렸다.
장맛비가 엿새를 넘기는 오늘 아침이다.
우면산을 한 바퀴 돌아 내려오다 너무도 반가운 이를 만났다. 생강나무 골짝에 핀 한 포기 노랑망태버섯이다. 샛노란 털실로 짠 둥근 망태기 그대로다. 갈색 고깔모자를 쓰고 산을 오르던 산중 사람이 무슨 일로 잠시 놓아두고 간 형상이다. 실뜨기 솜씨 좋은 사람이 만든다 해도 이만치 예쁘게 만들 수 있을까. 비에 젖어 우중충해진 골짝이 이 크고 샛노란 망태버섯으로 환해지는 듯하다
나는 반갑게 다가가 인사를 하고, 사진 몇 장을 찍었다. 조형미도 조형미지만 해마다 이쯤 이 어름에서 그와 만난다는 것이 즐겁다. 버섯은 아침에 피면 오후에 진다. 만나는 시간이 간소할 만치 짧지만 그나 나나 서로 만나기 위해 일 년을 기다려왔다. 그 긴 1년을 기다리며 사는 망태버섯에게 장맛비가 없다면 어찌될까.
비 내리는 숲을 가만히 살펴보면 버섯이 지천이다. 우산버섯, 분홍보라색의 앙증맞은 앵두낙엽버섯이 젖은 낙엽 사이로 촘촘촘 돋아 있다. 소나무 아래엔 잘 구워놓은 빵처럼 노릇노릇한 말불버섯이 나와 있고, 큰갓버섯이 우뚝 서 있다.
이들 모두 우리들의 시야 바깥에서 장맛비를 찾아왔다가 슬며시 가버리는 소수자의 목숨을 가지고 있다. 버섯을 볼 때마다 이들에게 미안한 말이 있다. 독버섯 타령이다. 버섯을 버섯으로 보지 않고 먹을 수 있느냐 아니냐로 졸렬하게 구분해 독버섯을 만들어내는 우리들의 식탁 논리가 그들에게 부끄럽다.
들과 산야에 태어나는 크고 작은 생명들은 인간의 식탁을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다. 물론 인간 사회도 강자를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다. 소수자에겐 소수자만의 존재 이유가 있다.
장맛비 부슬부슬 내리는 산길을 내려온다. 온몸이 비에 다 젖는다. 그렇다 해도 이들의 출현을 위해 이깟 비쯤 맞아줄 수 있다. 우리는 그 동안 볕을 충분히 받지 않았는가. 대추나무 대추를 걱정하지만 대추쯤 양보한다고 서러울 건 없지 않은가.
'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 오랜 추억의 잠 (0) | 2020.08.01 |
---|---|
자명종을 나누어 주다 (0) | 2020.07.29 |
선유도 공원 가는 길 (0) | 2020.07.17 |
무지개 사라진 자리 (0) | 2020.07.11 |
부분일식을 건너는 오묘함 (0) | 2020.06.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