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가을을 부르는 코스모스

권영상 2020. 8. 24. 21:46

 

가을을 부르는 코스모스

권영상

 

 

올 여름에 대한 기억이라곤 장맛비 말고는 없다. 억수같은 비로 시작해 억수같은 비로 막을 내렸다. 비의 입장에서 본다면 열연이다. 그러나 수모를 당하는 입장에서 본다면 참혹한 결말이다. 텃밭은 미처 물이 빠져나가지 못해 몇 날 동안 물에 잠겼고, 뜰앞 나무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비의 무게에 모질게 시달렸다.

 

 

뜰앞 꽃복숭아나무가 걱정이었는데, 결국 선 채로 반쯤 기우뚱해졌다. 지난 4월, 그가 피운 백설도화는 마을사람들의 입을 탔다. 그 꽃복숭아나무가 뜰을 건너오는 잔인한 비바람에 힘을 잃자, 부랴부랴 버팀목을 해주었다.

지붕에서 흘러내리는 홈통이 막혀 추녀끝 빗물받이가 빗물로 넘쳐났다. 우중에 차를 몰고 읍내에 나가 사다리를 구해 지붕에 올라가 봤다. 역시나였다. 까마중이 한 포기가 떨어진 단풍나무 잎을 그러모아 홈통을 틀어막고 있었다. 병마개처럼 단단히 절어 붙은 까마중이를 뽑아 올렸다. 물받이의 그득한 물이 일시에 벽력같은 소리를 치며 홈통을 타고 내렸다.

 

 

꼼꼼하지 못한 내가 시골집을 건사하는 일이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때 나는 시도 때도 없이 날아오는 폭우 재난 문자와 재난 뉴스에 잠을 설쳤다. 무엇보다 옆집이 문제였다. 지대가 턱없이 낮다. 집 뒤가 바위로 쌓아올린 높은 담벼락이다. 천둥이 칠 때마다 바위들이 굴러내리는 것 같아 나는 두려웠지만 그들은 걱정하지 않았다.

장맛비가 완전히 끝난 오늘 다시 안성으로 내려왔다. 내가 없는 사이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와 있었다. 뜸한 비 사이를 비집고 들어 심어놓고간 무골의 무는 빈 자리가 더러 있기는 해도 제법 파랗게 돋아났다. 쓰러진 백일홍도 일어나 있었고, 받침대를 세워준 꽃복숭아나무도 초췌해 보이지만 꼿꼿이 일어섰다.

 

 

풀이 자란 토란밭의 풀을 뽑다가 깜짝 놀랐다. 플라스틱 수도계량기 뚜껑이며 스치로폼 보온재가 토란밭까지 떠밀려와 있었다. 땅속에 묻힌 계량기는 속을 펀히 내보이고 있다. 텃밭에서 빠져나가지 못한 빗물이 계량기 속을 채우고 뚜껑을 밀어냈다. 흙을 깨끗이 털어 덮고는 호박밭에 나갔다. 고삐 풀린 들짐승처럼 길길이 뛰던 호박순들이 햇빛에 풀이 죽어 숙연하다. 제 아무리 호박이라도 그 독한 장맛비에 배겨날 도리가 없던 모양이다.

 

 

호박덩굴을 들추어본다. 그러나 얕볼 일이 아니다. 뜻밖에도 누렇게 익은 호박덩이들이 여기저기 눈에 띈다. 맷돌호박답게 저마다 자리를 단단히 잡고 앉아 장맛비와 싸웠다. 세상을 떠들어메고갈 듯 하던 빗소리에도 세상이 떠내려가지 않은 건 어쩌면 꿈쩍 않고 제자리를 지킨 맷돌호박 덕분이 아닐까 싶다.

그러고 보니 고추도 잎이 좀 누렇게 변했지만 장마 속에서도 붉을 대로 붉게 익었다. 뭐니 뭐니 해도 나무에 비해 열매가 많이 달린 모과나무가 낙과 없이 건재하다는 게 좋다. 우듬지가 너무 성해 쓰러질 걸 걱정했던 대추나무도 탈 없이 잘 견뎠다.

 

 

백암에서 차를 몰아 삼백로를 달려올 때에 본 논들이 떠오른다. 파랗게 자라던 벼가 벌써 누런 빛을 띠고 있었다. 아무리 아니라 해도 벼는 초록의 절정에서 가을 쪽으로 빛깔이 기울고 있었다. 여름 장마라는 한 고비를 넘어선 게 틀림없다. 세상의 빛깔이 장마 이전의 빛깔과 너무도 다르게 보였다.

여름에 대한 기억이 장맛비 밖에 없다고 불평했지만 우리의 삶의 시간도 비에 지쳐가는 사이 보이지 않게 익고 있었으리라. 호박밭 돌 틈 사이로 핀 분홍 코스모스 한 송이가 호젓이 가을을 부르고 있다.

 

<교차로신문> 2020년 9월 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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