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볕에 이불 널기
권영상
여름 장마는 가혹했다. 50일이 넘도록 우리들의 터럭만한 관용과 인내심에 흠집을 냈다. 비에 시달리고 코로나에 시달리느라 여름이 가도 가는 줄 몰랐다. 그야말로 자고나 보니 줄창 비를 뿌려대던 여름은 못난 사내처럼 훌쩍 가버렸다.
장맛비 떠난 자리에 남은 건 곰팡이 냄새. 안성에 내려와 이 방 저 방 방문을 열면 그 때마다 방에서 곰팡이 내가 났다.
“모처럼 날 좋은 데 빨래를 해야겠어!”
쏘는 볕을 내다보고 있던 아내가 볕이 아까운지 일어섰다.
장맛비 끝의 해는 유난히 따갑다. 볕에서 바삭바삭한 비스킷 냄새가 난다. 슬쩍슬쩍 불어오는 바람에 서늘한 가을 기운이 감돈다. 아내가 빨래를 하는 사이, 나는 데크 난간을 닦고 이불장의 이불을 모두 꺼내어 볕에 넌다. 가끔씩 내려와 며칠을 머물다 가도 봄이면 봄 이불이 있어야 하고, 여름이면 여름 이불이 있어야 한다.
뜰마당 나무와 나무 사이에 모자라는 빨랫줄을 맸다. 세탁기에 돌아가고 있는 것들을 위해 방안 의자란 의자도 다 꺼냈다. 접이식 철제 사다리며 하다못해 토마토 지주대까지 꺼내어 빨래 널 자리를 만들고 세탁기에서 나온 옷가지며 베개며 방석 잇을 널었다.
점심을 먹고 나와 보니 빨래가 볕에 마르는 게 눈에 보인다. 나는 마치 세탁소집 주인사내처럼 빨래 사이를 이리저리 걸으며 뒤집을 건 뒤집고, 볕이 옮아간 자리를 따라 방향을 틀어줄 건 틀어준다. 널어놓은 옷가지라 해봐야 직장에 다닐 때 입던 오래된 옷들이고, 이불이라 해봐야 버리지 못해 끌어안고 사는, 딸아이가 갓난쟁이일 때 덮던 배냇이불이거나 좀 더 커서 덮던 이불들이다. 그 오래된 것들에 추억이 배어있어 그런지 한 번씩 손이 더 간다. 나는 할 일 없는 소년처럼 빨래와 빨래 사이를 이리저리 거닌다. 볕 좋은 9월의 갈피를 찾아 거닐 듯이.
어린 시절이다. 아픈 어머니 대신 누님은 9월이면 개울에서 빨래를 했다. 주로 묵은 빨랫거리거나 읍내에서 한 통씩 사온 옥양목이다. 그것들을 양잿물에 삶아 개울물에서 빨고 헹구었다. 그런 빨래들은 개울가 방죽에 널었다. 꽃이 지고 씨앗을 여물리는 풀섶 위에 널어놓은 빨래는 슬렁슬렁 부는 바람에 마르고, 따갑게 쏟아지는 땡볕에 말랐다.
그게 다 마를 때까지 나는 누님과 개울바닥을 뒤져 조개를 잡았다. 그럴 때에도 허리를 펴고 잠시 돌아다보면 방죽의 하얀 빨래들이 학처럼 눈이 부셨다.
길 건너 푸른 지붕집에서 드릴소리가 난다.
그 집 주인 남자가 지붕에 올라가 있다. 올봄에 이사 오며 추녀에 꽤 넓은 테라스를 달았는데, 장맛비에 어디가 비틀렸거나 새는 모양이다. 철제에 구멍을 뚫느라 내는 날카로운 드릴소리도 오늘은 반갑게 들린다. 그러고 보니 우리 집도 기둥과 베란다 난간에 손가락이 드나들 정도로 틈이 생겼다. 가을이 오면 또 한 번 태풍과 비를 겪어야 한다.
우선 급한 대로 준비해온 실리콘으로 베란다 난간에 벌어진 틈을 메우고, 결로 방지를 위해 지붕에 세워놓은 캡 주변도 비가 들이치지 않게 턱을 높였다. 그러고는 무씨 봉지를 들고 나가 무씨가 나지 않은 텃밭 빈자리에 꼼꼼히 무씨를 심었다.
그러는 사이 아내가 마른 빨래며 이부자리를 걷어 들인다. 해가 서쪽으로 많이 기울었다. 아내가 한 아름 안은 보송보송한 이불에 코를 댄다. 곰팡이 냄새 사라진 자리에 가을볕 냄새가 깊이 스며들었다. 오늘밤은 잘 익은 볕을 덮고 자겠다.
<교차로신문> 2020년 9월 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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