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뒤뜰의 방솔나무
권영상
누구나 변해버린 고향을 보며 허전해 한 경험이 한 번씩은 있겠다. 나도 그렇다. 그 좋던 고향의 소나무 숲속 마을은 아파트촌에 밀려났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던 늪이며 둠벙이며 고갯길도 다 사라졌다. 보리가 자라던 들판도 번화한 거리가 되었다.
그런 중에도 그 옛적 그 자리를 아직도 지키고 있는 것이 있다. 방솔나무다. 마을 뒤뜰 넓은 보리밭 너머, 호수와 맞닿은 언저리에 서 있는 북방을 알려주는 소나무가 그 방솔나무다. 벌판에 홀로 선 독립수다. 아이들 서넛이 둘러서서 팔을 벌려도 못 잴 만큼 컸다. 키도 컸다. 어른 키의 열 곱절은 되고도 남을 높이였다.
뭐 이렇다 하게 놀거리가 없던 어린 우리들은 걸핏하면 방솔나무를 찾았다. 그걸 알고 어른들이 거기에 그네를 매어주었고, 우리는 줄창 그네를 탔다. 그러던 중 누군가가 그네 줄을 타고 방솔나무에 올랐다. 시작이 어렵지 누군가 한번 길을 내자, 우리들은 그넷줄을 타고 덩달아 나무에 올랐고, 급기야는 그네를 줄 사다리로 만들었다.
방솔나무 위는 방석 같이 판판했다. 가지들이 촘촘하게 얽혀있어 발이 빠지지 않을 만큼 탄탄했다. 그리고 운동장만큼이나 넓었다. 우리는 그 위에서 마냥 발을 구르며 뛰었다. 뛸수록 반동이 생겨 더 높이 날아올랐다. 날아오르면 오를수록 우리는 더 크게 소리쳤다. 구름을 만질 것처럼, 바람을 타고 더 높고 먼 데로 날아갈 것처럼 소리 지르며 뛰었다. 그러다가 지치면 차분해져 먼데 마을의 지붕들과 예배당의 첨탑과 읍내로 가는 길을 바라보았다.
그때 누군가가 울음을 터뜨렸다.
“발 밑을 봐! 너무 무서워!”
우리는 우리가 딛고 있는 방솔나무 밑을 내려다봤다. 그 가파른 높이에 소스라쳤다. 너무나 높은 곳에 올라와 있었다. 그런 높은 데서 뛰며 뒹굴며 소리치며 놀았다. 그날은 그것으로 덜덜덜 떨며 나무에서 내려와 마을로 돌아갔다.
“밤에 또 와서 가을별 볼래?”
헤어질 때 담이 큰 누군가가 그랬다. 아니 올 사람만! 그러더니 아니 나 혼자 가 볼래! 그랬다. 나무의 높이에 질린 나머니 애들은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날 밤. 방솔나무 밑엔 낮에 모였던 그 숫자대로 다 모였다. 우리는 그넷줄 사다리를 타고 방솔나무에 차례로 올랐다. 방솔나무 위도 들판처럼 어두울 대로 어두워 있었다. 밤이라 그랬을까. 대낮에 그랬던 것처럼 뛰는 애도, 소리 지르는 애도 없었다.
나무 위에 차례로 누웠다. 밤하늘 별들이 눈 안 가득 들어왔다. 별은 집마당 멍석에 누워 보던 별과 달리 더 크고 더 반짝였다. 금을 긋고 가는 별똥별과 노래하는 별, 새앙쥐들과 숨기 놀이하는 별......
방솔나무는 그 시절 우리가 하늘과 가까워질 수 있었던 유일한 공간이었다. 우리는 그곳을 통해 우리들 머리 위의 또 다른 세상과 만났다. 그러면서 우리의 꿈은 차츰 높아지기도 했지만 우리의 생각은 차츰 넓어지기도 했다.
요 몇 해 전이다.
벼르고 별러 그 방솔나무를 찾아갔다. 오래된 추억 때문일까. 내가 생각하던 커다란 방솔나무가 아니었다. 그저 보통나무 보다 조금 큰 볼품없는 나무였다. 무엇이 그렇게 컸던 방솔나무를 조그맣게 만들었는지…….
한가위 추석이 다가온다. 코로나 때문에 고향길에 나서게 될지 모르겠다. 고향을 떠나와 산지 오래 됐다. 거기 계신 작은형수님도 뵙고, 방솔나무에서 보던 별도 찾아보고 싶다.
교차로신문 2020년 9월 2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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