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916

우리는 연민의 굴레 속에서 살아간다

우리는 연민의 굴레 속에서 살아간다 권영상 소나무 산비탈을 오르고 있을 때다. 머리 위에서 까치가 울었다. 쳐다보니 두 마리다. 두 마리가 내가 가는 방향의 소나무 가지를 건너뛰며 요란하게 울었다. 아마 내가 이들의 영역에 들어오는 걸 원치 않거나, 이들에게 모종의 불상사가 일어났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짖어대는 울음소리가 예사롭지 않았다. 그러잖고야 이렇게 다급하게 울 수가 없었다. 나는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끼며 천천히 늘 오르던 길을 따라 올랐다. 웬걸, 저쪽 좁은 언덕길에 무언가가 움직였다. 털뭉치만한 새끼 까치였다. 나를 피한답시고 자꾸 내가 가는 언덕길을 앞서 걸어 올랐다. 새끼 까치와 나의 거리가 좁혀질수록 어미까치 목청이 더욱 요란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저들 어미들이 내게 달려들 것 같았..

아웃 오브 아프리카

아웃 오브 아프리카 권영상 모처럼 쉬는 날. 빈둥빈둥 놀고 싶었는데, 어쩌다 켠 텔레비전에서 불쑥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가 나온다. 낯익은 로버트 레드포드와 메릴 스트립. 덴마크 태생 카렌(메릴 스트립 역)은 아프리카 동부로 옮겨가 부유한 남편 브로와 결혼한다. 하지만 브로는 커피 농장 일을 아내에게 맡기고 자신은 늘 사냥을 하러 멀리 떠나간다. 남편을 기다리는 일에 지친 카렌 앞에 탐험 여행을 즐기는 ‘자유로운 영혼’ 데니스(로버트 레드포드)가 나타나고 그들은 사랑에 빠진다. 1900년대 초 유럽인들의 아프리카 식민지를 배경으로 하는 미국 영화다. 1986년 개봉 이후, 극장을 찾아가 몇 번 보았고, 오늘처럼 우연히 보기도 하지만 볼 때마다 느끼는 건 아름답고 경이로운 아프리카의 자연미다. 아프리..

그대와의 대화

그대와의 대화 권영상 대화는 늘 있다. 그러나 대화를 하고 돌아설 때면 허전하다. 이런 대화에 허덕일 때마다 나는 그대와의 대화를 기다린다. 그대와의 대화는 침묵으로 시작하지만 때로는 경건하다. 대화를 마치고 돌아서면 왠지 평온과 마음의 안정을 느낀다. 우리가 늘 하는 대화란 그렇지 않은가. 분위기에 따라 마음에 없는 말을 해야 하고, 자신도 모르게 속 깊이 간직한 비밀을 바보처럼 꺼내기도 한다. 그런 까닭에 대화가 끝나고 나면 나는 나 자신의 말실수와 바보스러움을 후회한다. “생각 없이 말했어. 그 말 못 들은 걸로 해줘.” 다음 날이면 대개 그런 전화로 대화의 찜찜하고 허전한 마무리를 하기 일쑤다. 그러나 그대와의 대화엔 그런 후유증이 없다. 그대는 내게 충직해 내가 발설한 비밀과 말실수에 언제나 침..

청년과 그림

청년과 그림 권영상 창고에서 꺼낸 등산배낭을 푼다. 그 안에 40여 년 전에 쓰던 내 그림도구들이 있다. 나는 폐광 속에 묻힌 불빛을 꺼내듯 내 오래된 청년을 꺼냈다. 이젤과 화구통과 20호짜리 캔버스 두 개가 나왔다. 꾹 닫힌 화구통을 열었다. 테레핀 오일 냄새와 함께 방금 짜다가 둔 것 같은 유화물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내 오랜 청년의 한 모퉁이 편린이다. 여기 앉아 그림을 그리면 좋겠구나! 다락방이 있는 집을 구하면서 나는 직장생활에 지친 나를 그렇게 달랬다. 그러나 그 후 10년을 흘려보내면서 나는 한 번도 캔버스 앞에 앉지 못했다. 시골은 시골대로 또 바빴다. 어디에 가 머물든 나는 바빴고, 그림은 늘 뒷전으로 밀려났다. 캔버스 앞에 앉는 일은 그림을 업으로 하는 화가가 아니면 실은 어렵다. ..

사다리가 있는 풍경

사다리가 있는 풍경 권영상 내려야할 전철역을 놓쳤다. 정신을 딴 데 파느라 한 정거장 더 가고 말았다. 역에서 내려 지상에 올라와 보니 알겠다. 봄이 깊다. 가로수들은 이미 녹음으로 우거졌고, 햇빛이 덥다. 놀이터를 지나고, 음식점 골목을 지나고, 한길을 건넌 뒤 느티나무 그늘 벤치에 잠시 앉았다. 무심코 눈이 가는 곳에 갤러리가 있다. 일어나 그리로 갔다. 평일이라 그런지 그림을 보는 이는 나 하나뿐. 한 바퀴 빙 둘러봤다. 성격이 다른 네 화가의 공동전시회다. 그 중에 내 눈에 띈 그림들이 있었다. 사다리를 주제로 한 풍경이다. 사다리는 이층 옥상에 세워져 있거나 이팝나무 꽃 가득 핀 나무 둥치거나 하늘에 떠 있는 구름에 걸쳐져 있었다. 나는 사다리가 있는 그림 앞으로 다가갔다. 마치 내가 그 사다리..

0.3초의 행복

0.3초의 행복 권영상 바람 분다 하더니 바람 분다. 마당가 조팝나무가 흔들리고 모과나무가 흔들린다. 흔들리는 건 그들만이 아니다. 건너편 산의 참나무들이 윙윙 바람 흉내를 내며 이리저리 몸을 흔든다. 바람 덕분에 기척 없이 살아가던 것들이 비로소 일어선다. 냉이꽃은 냉이꽃 대로 파르르 몸을 흔들며 일어서고, 나무는 나무대로 흔들흔들 몸을 흔들며 우주와 교신을 위해 잎을 피운다. 좀 힘들어도 풀이나 나무나 모두들 바람 불면 좋다. 다들 바람 속에서 흔들리며 살아온 것들이다. 그건 나도 그렇다. 조용할 대로 조용해진 마음보다 산란하게 마음이 흔들릴 때가 좋다. 그건 내가 살고 있다는 증거이니까. 나무든 사람이든 크든 작든 흔들려야 서 있는 자리가 굳건해진다. 바람 덕분에 처마 끝에 매달아 놓은 풍경이 찔끔..

어느 날 풍선이 내려왔다

어느 날 풍선이 내려왔다 권영상 가을 어느 날이었다. 창문을 열고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을 때다. 하늘에서 뭔가가 둥둥 내려오고 있었다. 그것은 차츰 내려오더니 우리 집 마당에 사뿐 내려앉았다. 파란 풍선이었다. 나는 마당으로 나가 방금 하늘에서 내려온 풍선을 집어 들었다. 풍선은 풍선인데 어린 시절에 불고 놀던 풍선보다는 약간 무게감이 느껴졌다. 그러나 누르면 감촉이 말랑말랑했다. 그렇다고 바람이 빠진 건 아니었다. 나는 풍선을 들고 풍선이 내려온 그 하늘을 올려다봤다. 풍선을 놓친 선녀들이 풍선을 찾으러 내려올 것 같은 깊고 푸른 하늘이었다. 보름달 뜨는 밤, 산중 폭포를 향해 날개옷을 날리며 한 무리의 선녀들이 내려온다는 그 멋진 풍경이 떠올랐다. 선녀들이 내려올 만큼 하늘은 푸르고 깨끗했지만 하늘에..

모종철이 다가오고 있다

모종철이 다가오고 있다 권영상 4월 중순이 지나면 모종 철이다. 해마다 모종을 내 보지만 하루 먼저 내는 것과 나중 내는 것의 차이가 크다. 종국에 가서야 뭐 그게 그거지만 초봄엔 모종의 하루해가 티나게 다르다. 더구나 일찌감치 밭 정리를 해놓고 기다리는 조급한 마음 때문에 모종도 서두르게 된다. 처음 몇 해는 모종 철이 오면 주로 읍내에 나가 상추며 쑥갓 겨자, 오크 등을 샀다. 모종가게 진열대에 내놓은 예쁜 모종들을 보면 그것만으로 성이 안 차 신선초니, 당귀, 삼채, 부추 모종까지 가지가지 사다가 심었다. 그러느라 손바닥만한 텃밭이 온통 채소 모종으로 가득할 때도 있었다. 철없는 농사꾼의 욕심이 부른 화다. 식구라곤 셋인데 채소는 한밭 가득이었다. 그해 상추며 쑥갓 당귀 꽃이 가득 핀 우리 집 텃밭..

남쪽의 젊은 시인 S에게

남쪽의 젊은 시인 S에게 권영상 그대는 잘 있는지. 동회에 일이 있어 다녀오다가 동회 앞 목련나무를 보며 그대를 생각했다네. 복지관 앞 앙상한 그, 무얼 얻으려 서 있나 했는데 아니었어요. 오히려 환한 밥덩이 몇을 가만히 내놓는 것이었어요. 그대의 시도 떠올랐다네. 그대의 ‘목련꽃’을 보면 그대의 시가 얼마나 솔직한지 나는 발걸음을 멈추어 그대의 목련을 한참 더 올려보았다네. 그러다가 내 발치에 떨어진 목련 꽃잎 한 장을 집어 들었다지. 혹시 이 하얀 꽃잎 위에다 그대에게 편지를 써볼까 하다가 다시 적당한 자리에 내려놓았다 네. 때 묻은 내 글을 쓰기에 목련꽃은 떨어진 꽃이어도 너무 순결하였다네. 이제는 내가 세상에 너무 많이 물들어서 풀잎이라 할지라도 그 위에 글을 쓰기가 미안하다네. 편지라고 하니 생..

얼룩말이 담장을 넘다

얼룩말이 담장을 넘다 권영상 얼룩말이 차도의 중앙선을 달리고 있다. 나는 텔레비전 뉴스를 보며 이게 뭔가 싶어 깜짝 놀랐다. 한길에 가득한 자동차 행렬과 그 차량들 사이를 드나드는 얼룩말.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이 두 대상을 조합하느라 나는 잠시 얼떨떨했다. 그러면서도 눈을 떼지 못했다. 얼룩말이 아프리카에서 방금 우리나라로 달려왔다면 이건 너무나 즐거운 상황이다. 아니 얼룩말을 싣고 날아가던 헬기에서 얼룩말이 방금 뛰어내렸다면 이것 역시 너무너무 재미있는 상황이다. 이도저도 아니라면 이건 느닷없이 나타난 어느 초현실주의 설치미술가의 작품일 수 있다. 허공중에 붕 떠 있는 르네 마그리트의 ‘피레네의 성’처럼 이 상황은 낯설다. 하늘에서 겨울비 대신 양복쟁이 사내들이 떼거지로 내려오는 그의 대표작 ‘골콩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