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914

토끼띠 해의 운세

토끼띠 해의 운세 권영상 “그대 토선생이 아니신가. 오늘에야 산중호걸을 만났도다!” 자라는 토끼를 보자, 수중 궁궐의 호의호식을 장담하며 그럴싸한 말로 토끼를 유인한다. 이 에 토끼가 망설이매 너구리가 ‘분수를 지키면 몸에 욕이 없다’며 만류하지만 토끼는 부귀와 공명이라는 말에 속아 자라의 등을 타고 수궁으로 떠난다. 고전소설 ‘토끼전’에서 토끼가 위험한 험지로 떠나는 장면입니다. 올해가 토끼띠 해네요. 그래서 그런지 운세 여기저기에 ‘토끼전’의 토끼의 성품이 배어들어 있네요. 이를테면 ‘어떤 계획을 세우든지 급하게 진행하지 마라.’, ‘조급한 마음으로 서두른다면 잃는 게 많다.’, ‘즉흥적 결정을 피하고 지혜롭게 처신하라.’, ‘지나친 욕심을 내지 마라.’, ‘휴식을 취하여 에너지를 비축하라.’ 등등입..

토끼처럼 깡총 뛰는 토끼해

토끼처럼 깡총 뛰는 토끼해 권영상 딸아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입니다. 교문 앞에서 샀다며 하얀 아기 토끼를 안고 왔습니다. 정말 너무 예뻤습니다. 우리는 딸아이가 안고 온 아기토끼를 돌아가며 한 번씩 안아보며 어린 동물이 내뿜는 특유의 귀여움에 푹 빠졌댔습니다. 우리는 그 날로 아기 토끼 이름을 지어주었지요. 하루! 하루의 소중함을 생각하며 하루라고 지었지요. 그 다음에 한 일은 집을 만들어주는 일이었지요. 그리고 마트로 달려가 유기농 채소와 과일을 사와 사료 대신 먹이로 썼지요. 잘게 썰어준 홍당무를 오물오물 먹는 입이란 정말 예뻤지요. 아무리 목석같은 사람도 갓 낳은 동물의 새끼에 빠지지 않을 수 없지요. 아침이 되면 우리 식구는 하루 앞에 모였지요. 양치질을 하면서, 넥타이를 매면서, 딸아이는 또 ..

새해엔 시간 부자가 되시기를

새해엔 시간 부자가 되시기를 권영상 책상 위에 모래시계가 있다. 그것은 언제나 내가 쓸 만큼의 시간을 담고 있다. 늘 애용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정지한 채 책상 위에 머물게 한다. 그의 시간은 시계처럼 막무가내로 나를 이끌고 가지 않는다. 내가 요구할 때 요구한 만큼 흘러가다 때가 되면 멈춘다. 모래시계가 내게로 온 건 몇 년 된다. 그때 나는 오래 다니던 직장을 그만 두었다. 갑자기 직장이 없어지자, 주체할 수 없이 많은 시간이 밀려왔다. 시간의 홍수 속에서 나는 허우적거렸다. 책을 읽건 놀건 컴 앞에 앉건 한번 시작하면 시간의 늪에 빠져들어 끼니를 잊거나 삽시에 일몰을 맞고는 했다. 그러면서도 뭐가 그리 바쁜지 요의가 느껴지면 내 방에서 화장실까지 불과 몇 미터를 달려가고 달려왔다. 시간은 풍족한데..

스스로 빛을 만드는 모과

스스로 빛을 만드는 모과 권영상 오늘도 눈 내린다는 예보가 있다. 올 들어 벌써 여러 차례 눈이 내린다. 건너편 산도 희끗희끗 겨울의 흔적이 역력하다. 그런데 딱 한 곳, 아직도 겨울의 이쪽에 머물러 있는 곳이 있다. 내가 사는 아파트 마당이다. 아파트가 넓은 미음자 형이라 그런지 그 안쪽은 아직 가을이다. 특히 모과나무 네 그루가 그렇다. 그들은 자유롭게 자란, 5층 높이의 거대한 나무들이다. 순조로웠던 지난 계절의 날씨 탓이었을까.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모과가 주렁주렁 달려 있다. 아파트가 바람을 막아주고 또 햇빛을 모아주어 그런 모양이다. 붉은 빛이 은은하게 도는 녹색 나뭇잎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시간이 갈수록 녹색 숲과 노랑 빛깔 모과들이 보색처럼 서로 빛난다. 등불을 내다건 듯 모과가 달려..

빨간 지붕집의 한바탕 풍경

빨간 지붕집의 한바탕 풍경 권영상 아니나 다를까, 안성집에 내려와 보니 길 건너 빨간지붕집 마당에 커다란 크리스마스트리가 서 있다. 그 집 부부의 열렬한 성향으로 보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내일 모레가 크리스마스, 내일이 이브다. 시간이 오후 쪽으로 기울수록 그 집 마당이 부산해진다. 주말을 피해 크리스마스를 앞당겨 즐기려는 모양이다. 차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한다. 아내의 여자 형제가 여섯이라던 그 집 남자의 말이 떠오른다. 웬걸! 저녁을 먹고 난 뒤에 보니 울담을 빙 돌아가며 달아놓은 등에 불이 환하게 켜졌다. 마당 한가운데에 세워진 트리엔 색색의 불이 반짝였다. 이윽고 그 집 성능 좋은 스피커에서 목청 좋은 ‘안동역’이 흘러나왔다. 추운 겨울밤을 녹일 듯 요 작은 마을이 들썩인다. 내..

초록색 별이 된 빈터

초록색 별이 된 빈터 권영상 아파트 앞 길 건너에 카페가 들어온다는 말이 돌았다. 나는 반신반의 했다. 카페가 들어오기엔 공간이 너무 크다. 옥상이 있는 빨간 벽돌 단층 건물과 그 건물의 다섯 배는 되고도 남을 담장으로 둘러쳐진 빈 터, 그 빈터를 보고 ‘정기화물’이 들어와 있었다. 정기화물은 운송화물을 분류하고 옮겨 싣는,재래식 사업이라 번잡하고 올드했다. 어떻든 그만한 사업체가 들어와 일할 만큼 공간이 컸다. 어느 날인가, 그 빙 둘러친 담장 대문에 누군가가 노랑과 보라 페인트를 칠하고 있었다. ‘유치원이 들어오려나 보네,’ 나는 그랬다. 기다랗고 멋없는 담벽도 기둥마다 청색으로 칠해졌다. 좀 유치한 듯 했지만 우선 시각적으로 산뜻했다. 그런 며칠 뒤 2층 옥상으로 올라가는 철제 계단이 만들어지더니 ..

주전자에 물을 끓이며

주전자에 물을 끓이며 권영상 날씨가 추워지면서 주전자에 물을 끓인다. 뭐 이것저것, 도라지도 한 조각 넣고, 영지버섯도 넣고, 결명자며, 산수유, 대추도 조금 조금 넣고 끓인다. 뭘 알고 넣는 게 아니라 그저 좋을 거라는 생각으로 넣는다. 주전자의 물을 끓이노라면 집안이 훈훈해진다. 뽀얗게 오르는 김, 보글보글 끓는 물소리, 주전자 뚜껑 여닫히는 소리, 그런 것들이 스산한 겨울철 집안 분위기를 부드럽게 바꾼다. 주전자는 제 입을 빌어 한 번도 말한 적이 없지만 분명히 이타적이다. 한 주전자 잘 끓인 물을 머그컵에 쭈르르 따른다. 두 손을 컵에 대고 뜨거운 물이 만들어내는 그 따끈한 열기를 먼저 즐긴다. 손을 댔다가 앗 뜨거! 하며 또 얼른 뗐다가 다시 댄다. 뜨거운 걸 알면서도 뜨거운 물의 유혹을 이기지..

구피가 돌아왔다

구피가 돌아왔다 권영상 구피가 돌아왔다. 3년만이다. “이제는 형님이 힘들어 해요.” 저번 길 건너 처형 댁에 들렀을 때 처형이 그런 말을 했다. 나는 별 생각 없이 ‘애도 왔는데 키워보죠 뭐,’ 하는 식으로 대답을 얼버무렸다. 얼버무렸다는 말이 옳다. 17년간 강아지 난나를 키운 끝이라 솔직히 구피를 돌려받아 키울 엄두가 안 났다. 구피는 맑은 어항 속에서 예쁘게 놀고 있었다. 모두 서른한 마리라 했다. 처음 처형 댁에 맡길 때 다섯 마리였는데 그렇게나 많은 식구를 불렸다. 깜장, 빨강, 초록 점박이와 황금빛 가로선이 있는 구피는 송사리처럼 앙증맞다. 예쁘다. “야, 진짜 예쁜 녀석들이네!” 구피를 들여다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런 탄성을 지른다. 부채처럼 활짝 편 꼬리를 흔들며 헤엄치는, 그 손톱만치..

요즘 세상 풍습

요즘 세상 풍습 권영상 집 가까운 느티나무 오솔길에서 가끔 유치원 아기들을 만나곤 했다. 내가 보기에 선생님을 따라 나들이도 할 겸 느티나무 숲의 자연도 만날 겸 찾아왔지 싶다. “선생님, 모르는 사람 가요.” 그 중 한 아기가 선생님인 듯 한 분에게 지나가는 나를 알린다. “웃어른한테 우리 인사합시다.” 그분이 그러자 선생님을 따르던 아기들이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한다. 10여 명, 귀여운 아기들의 인사를 한꺼번에 받는 일은 과분하다. 나는 가던 길을 잠깐 멈추고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답례를 해주곤 했다. 이들은 때로 느티나무 숲에 들어가 꽃을 찾고, 술래잡기 놀이도 하고, 낙엽 줍기도 했다. 우리 아파트에 사시는 분이 운영하는 유치원 원생들이다. 그들은 때로 여기에서 오솔길의 봄 여름 가을 겨..

살아 돌아온 광부들

살아 돌아온 광부들 권영상 봉화 아연 채굴광산 매몰사건 후, 221시간 만에 광부들이 살아 돌아왔다. 190미터 지하 갱도에서 무려 9일 20시간을 견뎌낸 그분들의 극적 생환이야말로 다름 아닌 기적이다. 답답한 우리 현실을 밝히는 한 줄기 생명의 빛이다. 내가 처음 직장 생활을 한 곳은 강원도 정선군의 탄광을 근거지로 하는 초등학교였다. 우리나라 채탄량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거대 광업소 덕분에 세상과 두절된 산간 속 소규모 초등학교는 60학급이 넘는 초대형 학교로 컸다. 교실이 모자라 오전 오후반 운영을 했고, 한 반 학생이 60여 명쯤 되었으니 전교생만도 무려 3000명이 넘었다. 학교 규모가 이 정도면 광업소에서 일하는 광부들만도 1000 여명이 넘는다는 이야기다. 광업소 확성기에서는 아침마다 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