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914

추석이 가까운 안마당 풍경

추석이 가까운 안마당 풍경 권영상 추석을 앞두면 아버지는 논에 나가 많지도 않게 올벼 대여섯 단을 베어오셨다. 그걸 벼 훑는 기계에 훑어 추석에 맞출 요량으로 멍석에 말리셨다. 그 무렵, 마당엔 올벼만이 아니라 고추밭에서 딴 익은 고추도 한두 멍석 널린다. 그리고 집 뒤 갯가에서 베어온 부들도 마당의 한 자리를 차지하여 마른다. 갯가엔 부들이 많았다. 부들을 베어 말려놓으면 한겨울 일손이 한가할 때 아버지는 그걸로 부들자리를 매셨다. 아직 장판이 없던 시절, 방에 깔기도 했지만 어업하는 이들이 고기잡이배 침실에 깔기 위해 사들였다. 키가 훤칠한 부들은 나무 사다리를 뉘여 놓고 그 위에다 가지런히 말렸다. 농가의 이 즈음의 마당은 아무리 넓다 해도 비좁다. 하지 근처에 캔 감자를 갈무리하는 곳 역시 마당이..

느티나무 길에서 만난 고양이

느티나무 길에서 만난 고양이 권영상 저녁 어스름 시간이다. 동네 산에 올랐다가 느티나무 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어디선가 고양이 우는 소리가 났다. 힘없고 연약한 울음소리였다. 여기저기 두리번거렸지만 고양이는 보이지 않았다. 다시 울음소리가 들렸다. 길을 따라 난 수로 안이었다. 거기 감장 고양이 한 마리가 울고 있었다. 지나가는 발소리를 듣고 운 모양이다. 나를 빤히 올려다본다. 내가 한 걸음 다가가자, 후닥 달아날 태세다. 그러면서도 한 녘으론 또 내게 구원의 손을 내밀 듯 그 연약한 목소리로 운다. 며칠 전에 본 그 고양이 같았다. 그때는 비가 왔다. 우산을 쓰고 이 느티나무 길을 가고 있는데 숲 안에서 고양이가 나를 보고 울었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되는 아기 고양이었다. 내가 야옹,..

나무 그늘을 밟아 돌아오다

나무 그늘을 밟아 돌아오다 권영상 치과에 들락거린지 오래 됐다. 이 나이에 거길 가는 이유야 뻔하다. 임플란트 때문이다. 가까이 있던 치과가 점점 멀어지더니 지금은 전철을 타야 하는 선릉역 주변에 가 있다. 늘 받는 치료지만 받을 때마다 그 고통이 아찔하다. 그럴 때면 음식을 먹는다는 일에 질릴 때가 많다. 치료가 끝나면 나는 그 얼얼한 턱을 감싸 쥐고 눈물을 쏟곤 한다. 오늘은 채 눈물이 마르지도 않은 눈으로 병원을 빠져나왔다. 햇빛에 어지럼증이 온다. 그런데도 또 무슨 나이답게 않은 오기가 발동했는지 전철역을 코앞에 두고 발길을 돌렸다. ‘집까지 걸어가 보자!’ 전철로 가자면 세 역을 가 환승까지 해야 한다. 멀다면 걸어가기에 먼 길이다. 어지럼증에 살갗을 파고드는 늦여름 햇빛까지 빤히 보면서도 나는..

피아노 소리가 나는 거리

피아노 소리가 나는 거리 권영상 비 그친 저녁이다. 노을이 붉게 하늘을 덮는다. 갑자기 맥주가 생각난다. 정말이지 오랜만에 느껴보는 기분이다. 나이를 먹느라 내 몸이 느끼는 감정은 자연히 뒤로 밀렸다. 다가오는 현실만 보며 살았다. 술 없으면 무슨 재미로 살까, 한때 그런 호기를 부렸는데 차츰 술과 멀리 떨어져 지낸다. 이러다가 술이 나를 잊어버리지 않을까 걱정 아닌 걱정을 할 때다. 그런데 오늘 그 감정이 돌아왔다. 나는 청바지를 꺼내 입고 집을 나섰다. 혼자 골목길을 걸어 카페 옆 맥주집에 들어설 때다. 길 건너 빌딩, 팍스 뮤직 음악원에서 피아노곡이 조용히 울려나온다. 가뇽이다. 나는 잠시 멈춘다. 피아노 소리가 노을에 묻혀가는 이 거리를 나직이 흔든다. 가끔 이 거리에서 만나는 피아노지만 오늘 따..

초콜릿 한 병

초콜릿 한 병 권영상 오랫동안 나가 있던 딸아이가 잠시 짬을 얻어 며칠 전에 귀국했다. 그래도 자식노릇 하느라 절약한 지갑을 털어 이것저것 선물을 사가지고 왔다. “이거 설탕이나 첨가물을 넣지 않은 100프로 카카오 초콜릿이에요. 아빠 혼자 드세요.” 초콜릿의 본 고장, 벨기에산 초콜릿이라며 두 봉지를 넣어왔다. 나는 그 말이 기특해 선뜻 그러마, 하고 받았다. 그러고 나니, 떠오르는 이가 있다. 안성 옆집에 사는 수원집 아저씨다. 지난해 늦가을이다. 수원집에 그집 큰아들 며느리가 한 달 쯤 혼자 와 있었다. 큰아들은 우리나라 기업 중국 지사에 근무하는데 거기서 얻은 중국인 며느리라 했다. 한국말도 익히고 한국문화도 익히라고 혼자 두고 갔단다. 가끔 안성에 내려가면 수원집 식구들 말소리가 창을 넘어 들려..

그 시절의 여름방학 숙제

그 시절의 여름방학 숙제 권영상 아이와 아빠가 숲길을 걸어온다. 아이는 한 손에 매미채를, 또 한 손에 채집통을 들고 있고, 아빠는 길옆 나무들을 살핀다. 아이의 여름방학 숙제를 도와주러 나온 모양이다. “없잖아. 매미.” 아빠를 잔뜩 믿고 따라 나온 아이가 실망하는 투다. “있을 거야.” 아빠는 연신 나무 둥치를 눈으로 훑으며 천천히 내 곁을 지나간다. 그들이 그렇게 살금살금 숲길을 따라가는 걸 보고 나는 씩 웃으며 돌아섰다. 그 옛날 우리들의 여름방학 숙제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때에도 지금처럼 곤충채집 숙제가 있었다. 시골에 살던 우리는 아빠와 함께 숲길에 나가는 게 아니라 순전히 혼자 나갔다. 혼자 힘으로 해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들 살기 바쁜 때였으니 자식에 마음 쓸 여유가 없었다. 매미채 대..

빗속에 호박꽃 피다

빗속에 호박꽃 피다 권영상 비 오는 아침, 문을 열고 밖을 내다본다. 호박꽃이 폈다. 호박밭 옆에 토마토 8포기를 심고 지주를 세워 주었는데, 호박순은 그 지주위의 햇빛이 탐나는지 짬만 나면 흘낏거렸다. “에비다! 거긴 네가 오를 자리가 아니야.” 그렇게 타이르며 끌어내리지만 언제 보면 또 넝큼 올라가 있다. 오늘은 아예 그 노란 호박꽃을 피워 들고 있다. 호박꽃은 비 오는 것도 모르고 꽃을 피우고, 무심한 하늘은 호박꽃 피는 것도 모르고 궂은비를 내려 보낸다. 둘 다 나무랄 수 없다. 호박은 먼 가을 누렁호박을 생각하면 우중이어도 꽃을 피워야 하고, 하늘은 또 호박꽃 피는 걸 뻔히 보면서도 우기를 그냥 지나칠 수 없었을 테니 모르는 척 비를 뿌리고, 호박은 또 모르는 척 꽃을 피우겠다. 토마토 지주 위..

까마귀는 재미있다

까마귀는 재미있다 권영상 요 몇 년 풍신이 몸이 아팠다. “네가 몹시 총명하니 올해도 내 부탁을 좀 들어다오.” 풍신은 까마귀를 불러 앉혔다. 이 풍신이 누군고 하면 ‘음력 2월의 신령이 된 바람’이다. 그러니까 바람의 신이다. 풍신은 해마다 음력 초하루면 사람 사는 집마다 내려와 그 집안 사정을 두루 살펴서는 그달 스무날쯤 하늘로 올라간다. 그는 옥황상제를 알현하며 집집의 사정을 고한다. 그 사정을 두루 들은 옥황상제는 그 해에 있을 마을의 길흉화복을 적어준다. 그걸 가지고 내려와 마을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일을 하는 분 이 풍신이다. “올해도 이 일을 네가 좀 맡아줬으면 좋겠다.” 까마귀는 기꺼이 풍신의 부탁을 받아들였다. 2월 스무 날, 까마귀는 풍신이 적어준 문서를 물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는 풍..

매미가 울지 않는 한여름

매미가 울지 않는 한여름 권영상 기온이 연일 30도를 오르내린다. 그건 여름이 점점 고비를 향해 치달아 가고 있다는 뜻이다. 밤이면 비다. 비도 폭우 수준이다. 폭염과 폭우가 나타난 게 벌써 유월 말부터다. 바깥에 나갔다 들어올 때면 몸 안의 열기가 달아올라 찬물 샤워에 매달려야 한다. 밤 역시 덥기는 마찬가지다. 기상예보도 몇몇 지역의 열대야를 예고하는 일이 잦아졌다. 이부자리를 안고 거실로 나와 보지만 한여름밤의 잠처럼 고단하다. 마치 8월을 옮겨놓은 듯한 7월이다. 보통 폭염은 7월 말에 시작하여 8월 15일을 정점으로 수그러들었다. 그러던 게 올해는 아닌 시기에 덜컥 찾아와 나도 모르게 에어컨에 손이 가게 한다. 아내가 시장을 보아온 박스에 바나나가 들었다. 하우스에서 재배한 국산 바나나라 달단다..

잘 못 알고 심은 나무

잘 못 알고 심은 나무 권영상 창가에 중국단풍나무가 서 있다. 10여 년 전에 손가락 굵기 만한 묘목을 심었는데 지금은 지붕보다 더 높이 커 올랐다. 사방으로 가지가 알맞게 벋어 여름 한철 그늘이 좋다. 그늘 뿐 아니라 바람 불 때면 잘잘잘 나뭇잎 부딪는 소리에 귀가 즐겁다. 나는 이 낯선 중국단풍나무라는 묘목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안성에 조그만 집을 구하고 창밖에 산딸나무 한 그루 심어보자고 양재동 나무시장에 갔었다. 그때가 4월. 수많은 묘목들 중에서 ‘산딸나무’라고 쓰인 팻말을 보고 샀는데 2,3년 키워보고서야 알았다. 그게 잘못 산 묘목이라는 것을. 나뭇잎이 작고, 모양이 튤립꽃처럼 생겼다. 들판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예민한 나무였다. 사람들은 그게 산딸나무가 아니고 어쩌면 튤립나무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