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914

감을 따다

감을 따다 권영상 “감 따러 갑시다.” 아침 설거지를 끝내자, 아내가 커다란 바구니를 집어 들었다. 나도 하던 일을 놓고 장대가 아니라 전지가위를 집어 들었다. 뜰마당 감나무에 감이 익은지 오래다. 감은 서리가 내리기 전부터 붉었지만 따는 걸 미루어왔다. 아내는 후딱 따는 것보다 오래 두고 보자, 주의였다. 그 말에 나도 동감이다. 감나무의 멋은 감잎 떨어진 뒤 가지마다 붉은 감이 매달려 있는 풍경이다. 우리가 처음 감나무를 심은 것도 감이 열린 늦가을 풍경이 그리워서였다. 나는 바구니를 든 아내와 문을 열고 나섰다. 감은 정확히는 단감이다. 심은 지 4년 됐다. 8년 전, 나는 매실나무와 모과나무를 심었고, 그 이듬해에 대추나무를 심었다. 그러니까 감나무는 그 썩 뒤에 심은 편이다. 늦은 가을 긴 장대..

아픈 가을

아픈 가을 권영상 가을이 깊어간다. 오솔길 느티나무 숲이 온통 노랗다. 가을이 도심 속으로 깊숙이 들어왔다. 바람이 불지 않는데도 느팃잎이 떨어진다. 빙그르르 돌면서, 나풀거리면서 곤두박질치듯 떨어져 내린다. 소리 없을 뿐이지 떨어지는 낙엽들도 생애의 마지막 아픔을 안다. 떨어지는 건 때로 아름답다. 하지만 때로 비애에 젖어들게 한다. 가을 여행을 사랑하는 이들도 있지만, 외로운 조락에 눈길을 돌리는 이들도 있다. 가을의 한가운데서 우리는 이태원 참사를 맞았다. 조락의 아픔이 더 없이 크다. 그날 오후, 나는 이태원 입구 한강진역 근처에 있었다. 4시쯤 ‘엘리자벳’을 보고 나오며, 이태원에 잠깐 들러보고 갈까, 그런 생각이 없잖아 있었다. 나는 체격 때문에 가끔 이태원 상가에서 운동화나 구두, 아니면 등..

강황을 저며 말리다

강황을 저며 말리다 권영상 마루에 김장매트를 깔고 햇볕에 말릴 걸 내온다. 해마다 조금씩 심어온 생강과 기껏 네 개밖에 못 딴 모과와 올해 지인의 권유로 처음 심어본 강황이다. 집의 안이 동향이다 보니 구름 없는 아침이면 햇빛이 좋다. 그 볕이 아까워 해가 들기 무섭게 둥그런 매트를 펴고 그 위에 널고 말리고 걷어들이는 일을 한다. 그게 내 몫이다. 생강과 모과는 얇게 저며 말려 보았지만 강황은 처음이다. 처음인 만큼 그 빛이 새삼 놀랍고 예쁘다. 지난해 겨울이 들어설 때쯤 아내의 친구가 참 좋더라며 강황 알뿌리 십여 개를 보내왔다. 카레가루를 만든다는 그것은 손가락만치씩 작지만 꼭 토란을 닮았다. 생강을 심을 때, 그러니까 4월 중순 그 무렵, 강황도 심었다. 모양은 토란이지만 그게 올라와 잎을 피우고..

그때는 왜 몰랐을까

그때는 왜 몰랐을까 권영상 내일 모레면 작은형님 기일이다. 돌아가신 지 엊그제 같은데 벌써 10주기가 돌아온다. 그때 작은형님이 입원한 병원은 동해가 내려가 보이는 언덕에 있었다. 입원했다는 연락을 받고 그 주 토요일 차를 몰아 내려갔다. 가을이었다. 병원 뜰엔 마타리가 노랗게 피어있었고, 소나무 숲 사이로 가을바다가 파랗게 눈에 들어왔다. 찾아가 뵌 작은형님은 옆구리에 의료 기구를 차고 있었다. 나는 병원 측의 허락을 받아 형님과 함께 바닷가 마을로 내려가 형님이 좋아하는 생선회를 시키고 마주 앉았다. 형님과 여유있는 시간을 가져보기는 우리 인생에서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작은형님지만 나이 차이가 있다. 작은형님 아래로는 누님이 세 분, 그 다음으로 내가 막내이다 보니 무려 16년이라는 시간의 ..

뱀조심

뱀조심 권영상 집 가까이에 산이 있다. 아침마다 오르기도 하지만 때로는 쉴 틈을 이용해, 때로는 하루의 무게를 느낄 때, 때로는 운동을 위해 오른다. 나무들이 무성한 산은 늘 조용하다. 산을 오르는 이들은 대개 나처럼 혼자다. 혼자 호젓한 오솔길을 걷는 일은 일종의 여가이며 여유다. 근데 그 호젓한 오솔길에 난적이 나타났다. 난적이란 오솔길 옆에 선 잣나무에 누군가가 붙여놓은 ‘뱀조심’이다. A4 용지에 검정 매직으로 쓰여진 손글씨다. 바람에 떨어질까 봐 투명 테이프로 겹겹이 친친 감아 놓았다. '뱀조심'을 보는 순간 마음이 섬뜩해졌다. 이 산에 웬 뱀이람! 나는 놀란 마음에 얼른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살폈다. 뱀이라면 얼마나 큰 뱀일까. 혹시 뱀에 물렸던 걸까. 아니면 크게 놀랐던 걸까. 타인을 위해 이..

문지방

문지방 권영상 가끔씩은 물걸레를 부착한 막대걸레로 방을 민다. 내 생각으로는 청소기보다 그게 방청소를 한 것 같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거실서부터 이 방 저 방 차례대로 치울 건 치우면서 좀 느긋한 마음으로 닦는다. 그때마다 떠오르는 게 있다. 문지방이다. 아파트 건물엔 문지방이 없다. 그 때문인지 평수에 비해 방이 넓게 보인다. 그러나 옛날 가옥들은 방마다 높은 문지방이 있다. 그 탓인지 방이 한결 좁아 보이고 답답하여 갇힌 느낌이 든다. 그 때문이겠다. 어른들은 문지방에 앉는 걸 질색했다. 거기 앉으면 복이 나간다. 어린 시절, 부모님으로부터 들어온 금기어다. 문지방에 올라서면 엄마가 죽는다는 말도 있다. 이들 모두 문을 가로막으면 그러잖아도 좁은 방이 더 좁아 보여 경계한 말일 수 있겠다. 실제로 좌..

간밤의 유에프오

간밤의 유에프오 권영상 계절이 가을에 와 있다. 이 즈음이면 한낮 풍경이 넉넉해 좋다. 근데 한낮 풍경만인가. 밤 풍경도 좋다. 밤 풍경 중에도 야심한 새벽 풍경에 나는 관심이 많다. 새벽잠에서 깨면 불을 켜지 않은 채로 커튼을 걷고 가만히 창문을 열어 바깥을 내다보곤 한다. 그건 어김없이 새벽 3시다. 오래된 습관이어서 내 몸의 시계는 1분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다. 그때마다 이 깊은 밤 새벽 풍경을 엿본다. 다들 잠에 든 이 시간의 풍경은 신비하다. 풀벌레들은 달빛을 받으며 쉼 없이 운다. 행여 달빛을 따라 온 고라니가 마을길을 배회하다가 돌아가는 모습을 볼까 싶어 마음이 설레기도 한다. 부엉이는 지금 건너편 숲에서 무얼 하는지, 뜰앞 꽃복숭아나무며 뜰보리수, 배롱나무는 이 밤에 어떤 빛깔로 별들과 ..

홍시

홍시 권영상 이런저런 일로 부모님 추석 성묘가 면목 없이 늦어졌다. 어찌 됐던 그 일이 오늘 이루어져 천만 다행이다. 그 동안 마음으로 부모님께 성묘가 늦어질 거라고 몇 번이나 말씀은 드렸다. 뵙고 나니 마음이 많이 홀가분해졌다. 96세를 살다 가신 어머니는 인생의 많은 세월을 우환으로 시달렸다. 그 우환의 절반을 어머니는 불행히도 병원에서 보내셨다. 그런 탓에 나는 어머니의 보살핌을 받아보지 못하고 성장했다. 어머니의 사랑이란 게 어떤 빛깔인지, 어떤 향기인지, 깊다면 얼마나 깊고, 넓다면 얼마나 넓은지를 알지 못한 채 자라서 어른이 됐다. 그런 내 곁에는 어머니 대신 아버지가 항상 계셨다. 항상이라고는 하지만 아버지는 대부분의 시간을 가족과 어머니 병구완을 위해 논밭에서 허덕이셨다. 어린 나는 가계비..

허수, 이 사람 너무 좋아말게

허수, 이 사람 너무 좋아말게 권영상 오랜만에 들로 나갔다. 내가 사는 곳에서 들이라고 하면 요 앞, 산 너머 벽장골이다. 산과 산 사이에 펼쳐진 논벌이 벽장골이다. 산모롱이를 돌아서자 논벌이 누렇다. 논두렁에 내려서서 벼 포기를 움켜잡아 본다. 내 손아귀가 큰데도 한 손에 다 잡히지 않을 만큼 포기가 찼다. 허리를 펴는데 논두렁 저 앞에 별안간에 나타나 달려가는 저건, 저건 논병아리, 논병아리 가족이다. 어미가 앞서고 새끼 세 마리가 털실뭉치처럼 도르르 구르며 따라간다. 나는 그들이 논두렁길을 다 갈 때까지 멈추어 섰다. 그들은 노란 가을 햇살을 받으며 돌돌돌 굴러가더니 이내 벼포기 사이로 깜물 사라졌다. 그제야 나는 그들이 사라진 곳으로 달려가 보았다. 한낮 꿈처럼 사라지고 없다. 이 근방 논에 물쿵..

기억의 좌표

기억의 좌표 권영상 아침 식사 후 동네 산에 올랐다. 이틀에 한 번씩 오르는 산인데 그 이틀이라는 시간이 때로는 헷갈린다. 습관적으로 반복되는 산행이고 보니 어제 산에 올랐는지 아닌지 기억이 모호할 때가 있다. 이틀에 한 번 꼴로 머리 감는 일 역시 그렇다. 어쩌면 정신 쏟는 일이 따로 있어 그럴지도 모르겠다. 기억을 의심하며 산마루까지 올랐다가 되짚어 돌아내려 올 때다. 잣나무 숲길에서 청설모를 만났다. 잣숲에서 청설모를 만나는 거야 신기할 게 없다. 잣이 익는 가을이 아니어도 잣숲에 청설모는 사시사철 눌러 산다. 그러니 청설모를 본다는 게 별반 놀라울 것도 없다. 청설모 입장에서도 마찬가지겠다. 길에서 사람을 만나는 일쯤이야 흔할 테니 청설모 역시 사람을 봐도 별로 대수롭지 않을 것이다. 오늘도 마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