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는 왜 몰랐을까
권영상
내일 모레면 작은형님 기일이다.
돌아가신 지 엊그제 같은데 벌써 10주기가 돌아온다.
그때 작은형님이 입원한 병원은 동해가 내려가 보이는 언덕에 있었다. 입원했다는 연락을 받고 그 주 토요일 차를 몰아 내려갔다. 가을이었다. 병원 뜰엔 마타리가 노랗게 피어있었고, 소나무 숲 사이로 가을바다가 파랗게 눈에 들어왔다.
찾아가 뵌 작은형님은 옆구리에 의료 기구를 차고 있었다. 나는 병원 측의 허락을 받아 형님과 함께 바닷가 마을로 내려가 형님이 좋아하는 생선회를 시키고 마주 앉았다. 형님과 여유있는 시간을 가져보기는 우리 인생에서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작은형님지만 나이 차이가 있다. 작은형님 아래로는 누님이 세 분, 그 다음으로 내가 막내이다 보니 무려 16년이라는 시간의 거리가 놓여 있었다. 형님이어도 쉬운 형님은 아니다. 큰형님이 집안일에 등한한 반면 작은형님은 늘 집안일을 염려하였다. 아버지 연세가 많아지실수록 그런 모습이 우리 눈에도 확연히 보였다.
내가 결혼을 할 때의 일이다.
직장 생활을 무려 7년이나 했지만 나는 아무 경제적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어느 날 작은형님이 형님 댁으로 나를 불렀다. 형님은 나를 앉혀놓고 패물이며 예식장 비용, 분가해 나가 살 집에 대해 일일이 물어보고 내 대답을 들은 후 봉투 하나를 내놓았다.
“글 씁네, 하고 사는 동생이 무슨 돈이 있을까 싶어…….”
나는 그만 그 소리에 낯이 붉어졌다.
그때 나는 동해안 조그마한 소도시의 학교에 있었고, 오래 사귀었던 지금의 아내는 서울의 변두리 학교에 있었다. 먼 거리를 두고 결혼을 하면서도 앞으로 어떻게 살지에 대한 막연한 희망만 있었을 뿐 미래는 불투명했다.
머뭇거리는 내게 형님은 그냥 주는 게 아니니 나중에 원금은 꼭 돌려줘야 한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 말에 염치없지만 그 봉투를 받아 넣었다.
나는 그걸로 서울에다 신혼집을 얻었고, 2년을 주말부부로 지내다가 다행히 아내가 있는 서울로 합류했다. 그 후 내핍을 거듭한 끝에 작은형님이 주신 원금을 만들어 찾아갔다.
“정신 차리고 살라고 자네에게 그렇게 말해 본 거라네.”
형님은 막내동생인 나를 ‘자네’라 불러주며 내가 내민 봉투를 되돌려주었다.
그때 이후로 고향집을 찾을 때마다 형님을 뵈었지만 형님을 모시고 번듯한 음식점에서 맛있는 음식이나 약주를 대접해 드리는, 좀 번듯한 동생 노릇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아니, 호젓한 호숫가를 함께 걸으며 형님의 이야기를 들어드린다거나 바다가 보이는 모래 언덕에서 소주 한잔을 여유 있게 기울이는 그런 우애의 시간도 만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건 아버지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고향이라고 내려가면 돌아올 찻길 걱정에 내심 서둘렀고, 바깥 볼일에 휘둘리느라 사람 노릇을 변변히 못했다.
이제 아버지도 작은형님도 세월을 따라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저쪽 세상으로 가시고 없다, 지금도 후회하는 건 그때 그 후 작은형님과 이승에서의 호젓한 한나절을 또다시 가져보지 못한 것이다. 남는 건 한 자락 회한뿐이다. 그 모두 인생을 꼭꼭 새기며 사는 게 아니라 허둥지둥 사는 내 천성 때문인 듯하다. 살갑기보다는 역할에만 충실한 게 나다. 같은 부모의 자식인데도 작은형님과 나는 그 점에서 달라도 너무 다르다.
<교차로신문> 2022년 11월 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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