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조심
권영상
집 가까이에 산이 있다.
아침마다 오르기도 하지만 때로는 쉴 틈을 이용해, 때로는 하루의 무게를 느낄 때, 때로는 운동을 위해 오른다. 나무들이 무성한 산은 늘 조용하다. 산을 오르는 이들은 대개 나처럼 혼자다. 혼자 호젓한 오솔길을 걷는 일은 일종의 여가이며 여유다.
근데 그 호젓한 오솔길에 난적이 나타났다.
난적이란 오솔길 옆에 선 잣나무에 누군가가 붙여놓은 ‘뱀조심’이다. A4 용지에 검정 매직으로 쓰여진 손글씨다. 바람에 떨어질까 봐 투명 테이프로 겹겹이 친친 감아 놓았다.
'뱀조심'을 보는 순간 마음이 섬뜩해졌다.
이 산에 웬 뱀이람! 나는 놀란 마음에 얼른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살폈다. 뱀이라면 얼마나 큰 뱀일까. 혹시 뱀에 물렸던 걸까. 아니면 크게 놀랐던 걸까. 타인을 위해 이런 경고용 문구를 만들어 테이프로 꽁꽁 붙여놓을 정도면 그가 입은 상처가 컸을지 모른다.
어제까지 호젓하게 느껴지던 산행 기분이 한순간에 깨뜨려졌다. 나무들과 가끔씩 나무를 오르내리는 청설모들과 나뭇잎을 뒤적이며 지나가는 바람과 새소리, 그 정도 외 그 이상의 것은 이 숲에 없다.
어찌됐건 그때부터 이 산이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나는 다시 그 ‘뱀조심’이라는 종이 글씨를 바라봤다. 두려움은 다른 곳이 아닌 그 ‘뱀조심’이라는 글씨에서 나오는 것 같았다.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그 잣나무 오솔길에 들어서면 우선 내 발 밑은 물론 여기저기 근방을 살피게 됐다. 산이 주던 맑은 바람과 호젓한 분위기와 한없이 편안해지던 마음 대신 그 두려운 난적이 드나들며 내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잣나무 오솔길을 오르면 언덕이 나온다. 어디나 그런 것처럼 거기에도 몇 개의 운동기구가 있다. 거기 ‘불조심’이라고 걸려있는 현수막 아래에 ‘뱀조심’이라는 난적이 또 있었다. 역시 A4 용지의 같은 사람 글씨다. 잣나무에 붙은 것과 달리 코팅을 한 경고문이 경사면에 반듯하게 놓여있었다. 볼수록 기분이 묘했다.
이 분은 누구일까. 산을 오르내리는 이들이 다치지 않도록 마음을 써주는 분일까. 그러다가도 사람 눈에 잘 띄는 곳에 ‘뱀조심’을 붙이거나 놓아두는 게 좀 지나치다 싶었다. 타인을 배려하기 보다는 어떤 공포심을 안겨주려는 심리가 엿보이는 듯 했다.
아니나 다를까. 어제다. 운동기구가 있는 언덕에서 숲을 관리하는 분들을 만났다. 그분들이 현수막 아래 놓여있는 그 ‘뱀조심’을 쓰레기 포대에 담으며 말했다.
“여기만이 아니에요. 다른 산에도 이런 걸 갖다 놓는 거예요.”
“정말 이 산에 뱀이 있는 건 아닐까요?”
내 말에 그분들이 고개를 저으며 “그런 거 없어요. 관심을 끌려고 이러는 거죠.” 했다.
이 산을 오르내린지 30년이 넘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이 산에서 뱀을 본 적이 없다. 어쩌면 그는 다른 무언가를 노리고 이걸 사용하는지 모르겠다.
이 ‘뱀조심’을 여기저기 붙여놓고 어딘가에서 혼자 즐기고 있는 게 아닐까. 아무리 자신을 숨기려 하지만 여기 붙어있는 이 ‘뱀조심’은 그의 얼굴이다. 그는 이 얼굴로 공포심을 느끼고 있을 사람들을 상상하며 키득거리거고 있으리라.
하의 실종 의상을 한 이들이 타인의 시선을 직접 느끼고 싶어한다면 이분은 '뱀조심'이라는 가면 뒤에 숨어 타인의 관심을 받으며 즐기는 심리가 그 내부에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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