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914

3월 봄바다

3월 봄바다 권영상 이른 아침 느닷없이 휴대폰이 울었다. 서훈이었다. “선생님, 봄바다 보러 내려오세요.” 갑작스런 전화에 나는 좀 망설였다. 그가 있다는 순긋 해변은 고향 인근 바다지만 서울서 3시간 거리다. 나는 급한 대로 알았다며 일단 전화를 끊었다. 먼 거리인데도 내가 흔들린 건 ‘봄바다’라는 말 때문인 듯 했다. 봄바다도 봄바다이지만 내가 내려가겠다고 한 것은 그가 내 오랜 제자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는 오랫동안 교직에 있었다. 그 어느 무렵 그는 우리반 학생이었고, 대학을 다닐 때나 군에 가 있을 때나 디자인 공부를 하러 외국에 나가 있을 때도 그는 나와 오랫동안 편지와 이메일을 주고받았다. 그가 한 때 직장을 그만 둘 때도 그는 나의 조언을 듣겠다며 나를 찾아왔었다. 그때가 벚꽃이 만개할 ..

겨울은 가고 봄이 오다

겨울은 가고 봄이 오다 권영상 모처럼 뜰안에 빈자리가 생겼다. 소나무가 섰던 자리다. 처음부터 우리가 손을 대기엔 너무 큰 소나무가 뜰안에 있었다. 그게 봄마다 민폐를 끼쳤다. 송화가루 때문이다. 4월 봄바람이 불면 송화가루가 흙길을 달려가는 자동차 먼지처럼 뽀얗게 날렸다. 남의 일이라면 멋있어 보였을 그 풍경이 내 일이고 보니 민폐였다. 우리 집은 물론 이웃집 창문이며 세워놓은 승용차 속을 비집고 들었다. 뜰에 널어놓은 빨래는 말할 것도 없었다. 가끔 방 청소를 해보면 안다. 물걸레 밑이 송홧가루로 노랬다. 그뿐 아니다. 나무둥치 하나가 이웃 밭으로 기울어져 그 집 농사에 지장을 주고 있었다. 궁리 끝에 소나무를 베어내기로 했다. 그러나 혼자 힘으로는 너무 커 불가능했다. 그런 내 마음을 알고 옆집 수..

사랑은 3월이 적격이다

사랑은 3월이 적격이다 권영상 2월이 갔다. 갔다고 해서 하는 말이 아니지만 2월의 길은 너무 짧다. 연인이 되기 위해 만나는 길이라면 서로 이름을 묻고, 나이를 묻고, 사는 곳을 물을 때쯤 끝나는 길이 2월의 길이다. 좀 더 깊은 대화의 길로 들어가기엔 28일은 너무 시간이 없다. 사랑을 시작하고 싶다면 2월보다는 3월이 좋다. 2월의 마음은 2월이 아니라 따스한 3월에 가 있기 때문이다. 2월 사랑은 슬픈 것도, 기쁜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행복한 것도 아니다. 사랑하고 헤어지면 고대 잊고 말 사랑이 2월 사랑이다. 사랑이란 서로를 물들이는 일이다. 그러나 2월 사랑은 스며들거나 깊어질 사이가 없다. 2월 사랑은 정이 없다. 헌신적이지 않다. 촉촉하지도 않고 산뜻하지도 않다. 정겹거나 물론 빛나지도 ..

호박과 자유와 오래 된 오해

호박과 자유와 오래 된 오해 권영상 부끄러운 일이지만 30여 년 직장 생활을 하면서 나는 하루도 아침을 거른 적이 없었다. 그 말은 단 하루도 직장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뜻이며, 단 하루도 아침 식사라는 오래된 습관에서 자유롭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하여튼 그 시절 나는 나를 스스로 잘 옭아매는 것이 잘 사는 것이라 여겼고, 잘 순응하는 것이, 그 질서에 잘 길들여지는 것이 행복이라 생각했다. 직장을 그만 두면서부터 나의 아침밥 강행군도 끝났다. 시골에 조그마한 텃밭을 마련하면서 나는 완고한 질서로부터 자유로워졌다. 그것은 순전히 호박 때문이다. 땅 한 켠에 비스듬한 바위 둔덕이 있었는데, 집을 안내해준 분이 말했다. “여기에 호박덩굴을 올리시면 호박 맛을 제대로 보시겠네요.” 나는 그 말..

2월에 만나는 올똘댁 할머니

2월에 만나는 올똘댁 할머니 권영상 코로나19가 힘을 잃어가자, 결혼식 초대장이 심심찮게 날아온다. 오늘은 조카의 딸 혼사가 있는 날이다. 다행히 혹한을 이어가던 날씨가 풀렸다. 예식을 마치고 바깥에 나오니 예식장의 넓은 뜰이 봄처럼 뽀얗다. 나는 고향 분들을 배웅하려고 그분들이 타고 올라온 전세버스로 향했다. 고향을 떠나온 지 40여년. 버스 곁에 서 있는 나를 보고 한 무리의 젊은이들이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준서 삼촌이시죠?” 중년의 중후한 남자가 내 앞에 와 인사를 했다. 머뭇거리는 내게 그가 대뜸 말했다. “저, 자름집 막네이입니다.” 그는 자신의 고향집 택호를 얼른 댔다. 그제야 나는 ‘아, 자름댁!’ 하며 반겼다. 그 순간 그 옛날 자름댁 어른이신,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중년의 남자의 아..

벌써

벌써 권영상 달력을 보다 ‘세상에 벌써?’ 하고 놀란다. 벌써 2월 6일이다. 2월 달력을 넘긴지 얼마 됐다고 벌써 2월의 둘째 주 월요일이다. 놀랄 일은 그것만이 아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라며 카톡 보내던 일이 엊그젠데, 벌써 2월에 와 있다. 나만 그런가. 내게만 시간이 빠르게 지나가는 건가. 나는 탁상 달력을 집어 들고 지나간 1월을 도로 넘겨본다. 새해맞이가 있었고, 설이 있었고, 신년모임이 두 번, 그리고 백수를 넘긴 이모님이 돌아가셨다. 하는 일없이 놀거나 여유를 부린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나는 지나간 시간을 허송세월한 것처럼 아쉬워한다. 아니 무슨 죄나 저지른 것처럼 참회한다. 깊은 밤, 잠에서 깨어 조용히 창밖을 내다볼 때가 있다. 광활한 하늘에 떠 있는 별을 올려다 보면 알 수 없는 ..

설거지 그리고 배추꽃 사과

설거지 그리고 배추꽃 사과 권영상 겨울이 점점 깊어간다. 영하 17도의 혹한 엄습도 한두 차례가 아니다. 한 주일 고비를 넘기고 나면 숨 돌릴 사이 없이 더 무서운 혹한이 찾아온다. 조금 흘려놓은 시골집 수돗물을 단속하러 나는 겨울 내내 안성을 오르내렸다. 딸아이는 대학에서 가져온 프로젝트로 밤을 새우고, 아내는 전시 작품이 촉박하다며 집안일에 손을 놓은지 오래다. 오늘은 설거지 일로 싫은 소리가 오갔다.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나는 얼른 집을 나섰다. 가끔 가던 도서관을 찾았다. 나 같은 처지의 남자들이 거기 구름같이 모여 있었다. 힘들여 찾아간 그 곳을 나와 혼자 추운 길을 터벅터벅 걷다가 길옆 카페에 찾아 들었다. 커피 한 잔을 주문하고 자리에 앉아 따스한 분위기에 마음을 막 녹이고 있을 때다. 들어..

내가 들은 설 이야기

내가 들은 설 이야기 권영상 오래 전 일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로부터 들은 설 이야기가 있다. 예전엔 섣달그믐날 초저녁에 조상님께 차례를 지내고 떡국을 먹었다는. 그때는 그 말씀을 무심히 들었다. 그 후, 빠르게 흘러가는 세상에 편승하느라 섣달그믐날에 떡국을 먹는다는 말씀을 까맣게 잊고 살았다. 한때는 신정을 쇠라고 나라가 신정 1,2,3일을 연휴로 만들더니, 또 한 때는 구정을 명절로 쇠라며 구정 전후 3일을 명절 연휴 기간으로 정했다. 우리의 지난 과거는 이렇게 정치에 끄달리며 혼란스럽게 살아왔다. 그랬으니 어렸을 적에 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되새길 여유가 없었다. 언제 또 어떤 구실로 이 구정 명절이 다른 무엇으로 바뀔지 지금도 우리는 모른다. 설을 쇠면서 아버지 말씀의 단초를 열기 위해 찾아낸 말이..

아내의 생일 선물

아내의 생일 선물 권영상 설이 지나면서 겨울이 점점 깊어간다. 바쁜 1월의 모임과 행사를 모두 마쳤다. 그제야 안성집이 생각이 났다. 물을 조금 틀어놓기는 했지만 점점 심해지는 한파에 집안 수도가 얼까 걱정됐다. 그 동안 사람들을 만나며 부대꼈으니 좀 춥기는 해도 안성에 내려가 조용한 시간을 갖고 싶었다. “먹을 걸 좀 챙겨 줘.” 내 부탁에 아내는 평소처럼 아무 말 없이 반찬 몇 가지를 만들어 줬다. 그걸 싣고 부랴부랴 안성으로 내려왔다. 지난번에 온 눈이 아직 그대로다. 틀어놓은 수돗물을 살폈지만 다행히 얼지 않았다. 집안을 정리하고 마당에 나섰다. 건너편 목수 아저씨네 나무 보일러 굴뚝에서 하얀 연기가 펑펑펑 아랫마을 쪽으로 빠르게 날아간다. 어쩌면 지금 목수 아저씨네 손자들이 보일러 아궁이에 고구..

내게도 반려 작물이 있다

내게도 반려 작물이 있다 권영상 “반려 식물 샀어.” 바깥일을 보고 돌아오는 아내의 손에 화분 두 개가 들려있다. 동네 가게에서 샀다는데 하나는 여우꼬리선인장이고, 하나는 콩난이라 했다. 나는 단번에 아내가 내려놓은 이 반려 식물이라는 것에 호기심이 갔다. 예쁘기도 하거니와 이름조차 마음에 쏙 들었다. 여우꼬리니 콩난이니 하며 이름을 부를 때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들이 태어나 살던 곳을 즐겁게 상상하게 된다. 콩난은 잎도 줄기도 없다. 끈으로 구슬을 꿰어놓은 듯 작고 앙증맞은 식물이다. 여우꼬리선인장은 햇빛을 충분히 받으면 가시가 여우 꼬리털처럼 황금빛으로 변한단다. 아내는 그걸 햇빛 가득한 앞 베란다 빨래건조기 위에 올려놓았다. 반려 동물이란 말은 들어봤어도 반려 식물이란 말은 처음이다. 웬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