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916

우울한 여름

우울한 여름 권영상 30대 후반의 일이다. 그때 내게는 초등학교 1학년인 딸아이가 있었다. 어느 날, 가까이 지내던 친구가 시골로 이주하겠다고 했다. 그것도 서울서 먼 지리산 근방 산속 마을이었다. 곧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될 자식을 학교 공부에 시달리게 하고 싶지 않다는 게 이유였다. 그의 말대로라면 반 아이들과 사이좋게 지내고, 자연을 접하며 성장할 기회를 주고 싶다는 것이었다. 지방에서 서울로 갓 올라와 교편을 잡은 나로서는 멀쩡한 직장을 버리고, 자식을 위해 낯선 시골로 내려간다는 그의 말이 듣기에 조금 불편했다. 어디 가든 경쟁이란 있고, 오히려 자식을 세상에 뒤쳐지게 하는, 나중에 자식으로부터 원망 듣는 일이 될 지도 모른다며 나는 그의 결정을 만류했다. 그러나 그는 직장을 버리고, 아내와 자식..

기껏 토마토 12개를 위해

기껏 토마토 12개를 위해 권영상 연일 폭우다. 폭우는 점점 거칠어지고 양은 해마다 많아진다. 우리나라가 지금 여름비의 한복판으로 질주하듯 달려들고 있다. 틈을 내어 바깥에 잠깐 나가 호미를 잡고 들어오면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된다. 그때마다 찬물 샤워로 펄펄 끓는 몸을 식힌다. 거친 여름비와 폭염, 예년에도 이랬나 싶게 여름이 점점 거칠어진다. 안성 일을 보고 빗길을 달려 서울로 올라오면 또 안성 걱정이다. 거기엔 많지는 않아도 12포기 심어 키우는 토마토가 있고, 강낭콩 여섯 줄이 있다. 둘 다 장맛비에 약한 작물이다. 비가 내려 토양에 수분이 많아지면 토마토는 수분 흡수가 높아져 껍질이 터진다. 상처 난 토마토는 폭염에 견디지 못하고 이내 상한다. 강낭콩도 마찬가지다. 비에 쓰러져 꼬투리가 흙에 닿..

비 내리는 날의 산행

비 내리는 날의 산행 권영상 “비 내리는 한여름에 등산은 무슨!” 여름 산행을 위해 배낭을 꾸리는 나를 보면 아내는 늘 그랬다. 서울이 맑다고 설악산도 맑을까. 이 말은 내 산행을 가로막으려는 아내의 논리다. 그래도 나는 또 뭔 배짱이 있어 한번 간다면 가고 만다. “비 내리는 날의 산도 산이잖아. 덥지도 않고.” 나는 그쯤 말로 아내를 달래고 집을 나선다. 여름 등산은 당연히 비 아니면 쨍이다. 쨍한 날의 등산은 쨍해 좋지만 비 오늘 날의 등산은 또 나름대로 쨍한 날에 경험하는 못하는 기쁨이 있다. 이제 와 하는 말이지만 나도 오랫동안 가급적 쨍한 날을 가려 산행을 해왔다. 그러나 그때마다 겪는 게 있다. 동서울버스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인제 용대리나 양양 오색에 도착하고 보면 비를 만나기 일쑤다. 산..

점심에는 감자를 먹다

점심에는 감자를 먹다 권영상 비가 뜸한 사이로 감자 한 이랑을 캤다. 그중에 몇 알을 골라 점심엔 감자를 먹기로 했다. 감자를 씻으러 수돗가에 나가는 사이, 그새를 못 참고 비 온다. 굵은 비다. 수돗물을 틀어놓고 안에 들어가 우산을 쓰고 나왔다. 서쪽 하늘을 올려다보니 구름이 검다. 금방 그칠 비가 아니다. 수돗가 머위 밭에 여태 눈에 들어오지 않던 봉숭아꽃이 비 맞으며 핀다. 지난해 피는 걸 그냥 두었더니 익은 꽃씨가 화살처럼 튕겨져 나가 여기저기 올라왔다. 머위가 성장을 멈추는 사이 봉숭아가 훤칠하게 컸고, 꽃도 가득 피웠다. 분홍이다. 추억이 많은 꽃이라 그런지 볼수록 참하다. 그리고 볼수록 정이 간다. 턱과 어깨 사이에 우산을 끼고 앉아 감자를 씻는다. 금방 캔 햇감자라 손만 대어도 껍질이 벗겨..

비 내리는 날의 풍경

비 내리는 날의 풍경 권영상 창밖에 비 내린다. 장맛비다. 빗소리가 아파트 마당을 꽉 채운다. 빗소리 외에 다른 소리가 들어설 자리 없이 오후가 요란하다. 창가에 서서 그 먹먹한 비를 내다본다. 아파트 마당가에 둘러선 모과나무, 감나무, 느티나무 가지들이 활처럼 휘었다. 나는 우산을 펼쳐들고 길에 나섰다. 오늘 같이 비 내리는 날 찾아가 볼 데가 있다.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갤러리다. 갑갑한 생각을 뒤집어 보려고 가끔 찾아갔었다. 아니 더욱 솔직하게는 그림에 대한 감수성을 잃을까봐 찾아가곤 했다. 비는 갈수록 거칠어진다. 방향을 잃은 짐승처럼 휘몰아친다. 비는 신발이며 바짓가랑이를 적시더니 어깨며 등까지 집어삼킨다. 우산대를 잡고 비에 맞서는 일은 즐겁다. 요 근래 이렇게 쏟아지는 폭우는 처..

기다림이 끝나는 신호

기다림이 끝나는 신호 권영상 아침에 일어나면 텃밭 생강두둑부터 나가본다. 농사일이 힘들다 해도 생강 순 올라오기를 기다리는 일만큼 힘들까. 아침저녁으로 물을 충분히 주지만 아직도 그들은 감감무소식이다. 강황 심은 두둑 역시 그렇다. 생강과 강황은 지난 4월 19일에 심었다. 심은 지 벌써 두 달이 지났다. 이들의 늦은 출현이 잔인하다. 성장하기 좋은 계절을 외면하고 두 달씩이나 컴컴한 땅속에 머물러 있다. 남쪽 아열대가 그들의 고향이라 해도 우리나라 5월과 6월 기온도 그리 만만치 않다. 지난해에도 그들을 기다리는데 봄을 다 바쳤다. 그때에도 새순이 나오는 데 50여일이 걸렸다. 그때는 처음이라 이들 두둑을 파헤쳐 보고 싶은 유혹을 수시로 느꼈다. 식탁에 올라오는 생강이며 강황에 이런 기다림이 숨어있음을..

기도하건대 하늘의 도움으로 부디

기도하건대 하늘의 도움으로 부디 권영상 작은형수님 생신이 다가온다. 음력으로 오월 초나흘. 단오 하루 전날이다. 작은형님이 살아계실 때는 생신 날짜를 몰랐다. 가신 뒤에야 알게 됐다. 그로부터 나는 몇 번 형수님 생신에 찾아뵈었다. 초나흘이 되려면 아직 열흘쯤 남았지만 올해는 좀 일찍, 그러니까 내일 뵈러 갈 참이다. 보름 전에 작은형수님과 통화할 때만 해도 생신에 내려가겠다고 말씀 드렸었다. 그때 형수님은 마당에서 넘어져 병원에 입원해 계셨다. 그것도 연세 많은 분들이 가장 경계하는 고관절 손상으로 중환자실에 계셨다. 나는 간병인을 통해 어찌어찌 형수님과 간신히 통화를 했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았다간 형수님을 영영 뵙지 못 할 것 같다는 불안감이 나를 휩쌌다. 형수님 목소리가 알아듣기 어려울 정도로 ..

탁상시계

탁상시계 권영상 오늘, 탁상시계가 늘 해오던 임무를 멈추었다. 이럴 날이 올 줄 알았다. 느낌에 수명이 다 한 듯 하다. 그간 몇 번의 사고가 있었다. 결정적인 건 지난 금요일 줌 시상식을 앞두고 있을 때다. 담당자로부터 오후 7시 모임에 나와 간단한 인사말을 좀 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후배가 문학상을 받는 시상식 자리였다. 그러잖아도 축하인사 한 마디쯤 해 드려야할 이유가 있어 시상식 시간을 기다렸다. 10분 전에 들어와 달라는 말대로 10분쯤 남겨놓고 줌 바로가기를 눌렀다. 아이디와 그쪽에서 준 비번을 넣으면 곧장 입장이 되었는데 뜬금없이 이메일 주소와 비번을 넣으라는 거다. 한번 넣은 비번이 틀리자 자꾸 틀렸다. 시계를 보니 7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아내가 내 방 문을 삐끔히 열었다. 벌써 ..

옥상 위의 카페

옥상 위의 카페 권영상 반쯤 열린 창문으로 바이올린 소리가 들려온다. 위층에서 누군가 음악을 듣고 있으려니 했다. 나도 가끔 유튜브 음악을 들으면서 아래윗층분들의 조용한 시간을 방해할까봐 걱정했었다. 창문을 닫았다. 닫고 나자, 소음 같던 바이올린 소리가 오히려 질서를 잡으며 바르게 들린다. ‘저 여린 가지 사이로 혼자인 날 느낄 때 이렇게 아픈 그대 기억이 날까.’ 김현식의 ‘내 사랑 내 곁에’다. 근데 들려오는 방향이 위층이 아니다. 나는 창문을 열고 창밖으로 고개를 내었다. 아, 그 집 옥상이다. 아파트 길 건너편 카페. 요 몇 달 전에 카페를 낸 그 카페 옥상에서 바이올린 소리가 들려온다. 옥상엔 파라솔 그늘 아래 커피를 마시는 이들이 있었는데 파라솔이 사라지고 흰 천막이 여러 개 쳐져 있다. 재..

나는 갑자기 시간 부자가 됐다

나는 갑자기 시간 부자가 됐다 권영상 모임에 나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아내의 바깥 볼일에 맞추어 함께 나오다 보니 그만 좀 일찍 나왔다. 기껏 아파트 정문에서 서로 헤어질 걸 가지고 20여분이나 당겨 나왔다. 시간을 들여다볼수록 좀 아쉽다. 혼자 전철역을 향해 터덜터덜 걸었다. 갑자기 얻은 이 많은 시간 때문에 늘 지나치던 길갓집 장미 앞에 서 본다. 흔히 보는 빨간 줄장미가 아니다. 분홍색, 해당화꽃 모양의, 낯설지만 예쁜 장미꽃이다. 다가가 코를 내어 향기를 맡아본다. 곱다. 이름이 궁금해 사진을 찍어 ‘모야모’에 보냈더니 시애스타라 한다. 지중해 연안이 고향인, 꽃말이 정오인 낮잠이다. 모르는 길고양이 한 놈이 내 발아래에 다가와 나를 쳐다본다. 야옹! 말을 걸어본다. 나를 데려다 줄 것처럼 앞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