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914

먼 데를 바라보는 일

먼 데를 바라보는 일 권영상 다락방은 정말이지 별 용도 없이 지어진 것 같다. 여름엔 너무 덥다. 그런 반면 겨울은 너무 춥다. 가뜩이나 다락방으로 연결된 온수 배관 파이프가 어느 추운 해 동파되는 바람에 아예 그 지점을 절단해 버렸다. 그러니 더우면 더워서, 추우면 추워서 다락방에 올라가지 않는다. 암만 생각해도 다락방은 별로 쓸모가 없다. 이 다락방을 왜 만들었는지 이 집을 지은 목수를 한때 탓했다, 그런데 가끔 다락방 발코니에 나가 먼 곳을 바라보면서 비로소 그 까닭을 조금씩 알아간다. 눈앞에 드러나는 논벌과 그 논벌 끝 비스듬한 산 언덕, 4월이면 복숭아꽃으로 붉게 물드는 그 산 언덕 과수원. 여기서 3킬로미터는 되겠다. 과수원 너머엔 첩첩이 산이고, 그 어느 먼 산엔 파란색 물류센터가 보인다. ..

세상을 보여주던 방솔나무

세상을 보여주던 방솔나무 권영상 고향에 가면 지금도 있다. 방솔나무. 두 아름드리는 될 성 싶다. 보통 소나무들처럼 미끈하게 위를 향해 뻗어 오른 게 아니라 어느 쯤에서 사방으로 가지를 펴 맷방석 같이 평평하게 얽혀 있다. 그 위에 올라가 눕는다 해도 전혀 발가락 하나 빠지지 않을 만큼 탄탄하다. 방솔나무는 마을의 뒤편, 호수가 펀하게 보이는 곳에 서 있다. 서 있는 방향이 마을의 북쪽이다. 정확하게 북쪽인지 모르겠으나 그쪽 방위를 가리키는 소나무라 하여 아마 방솔나무라 부른 것 같다. 나무는 7.80여년 생, 우람하다. 근데 그 나무를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서울에서 만나고 있다. 나무는 모 제약회사의 개방된 뜰 마당에 서 있다. 나는 아침이면 출근삼아 동네 산을 찾는데 도중에 남부순환로 건널목을 건너게..

아침 미닫이문 여는 소리

아침 미닫이문 여는 소리 권영상 오전 여섯 시 반쯤, 다르르, 울리는 미닫이문 소리에 긴 잠에서 눈을 뜬다. 겨울이라 그 무렵의 방안은 아직 어둑신하다. 새벽이라면 아직 새벽이고 아침이라면 이른 아침인 겨울날이다. 나는 방안 벽에 걸린 시계를 본다. 예의 그 시각이다. 여섯 시 반경. 미닫이문 여는 소리는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사는 아파트 옆집에서 나는 소리이다. 이때면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 댁의 누군가가 잠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연다. 밤사이 방 안 공기를 내보내고, 서늘한 새 공기를 받아들이려는 모양이다. 다르르, 창호문 바퀴가 레일을 따라 굴러가는 소리에 방안도 울리고 내 마음도 울린다. 방금 눈을 떴으니 잡념 하나 있을 리 없는 텅 빈 내 몸이 고요히 울린다. 그 소리는 바람처럼 가벼우면서도 ..

좀 기다리면 먹을 수 있단다

좀 기다리면 먹을 수 있단다 권영상 내 고충을 들은 딸아이가 컴퓨터를 구입해 놓았단다. 새로 컴퓨터를 사면 여러 파일을 옮기는 작업이 번거롭다. 딸아이가 제 직장으로 돌아가기 전에 바꾸긴 바꾸어야 했다. 지금 쓰는 컴퓨터는 산 지 12년이나 됐다. 적지 않은 시간이다. 그 사이 나는 직장에서 벗어났고, 안성에 텃밭을 구해 텃밭 농사를 짓고 있다. 그러면서 퇴직 후의 일상에 그런대로 적응하고 있는 중이다. 내 컴퓨터 작업이야 뻔하다. 주로 ‘한글’ 작업이다. 그외 방문자수가 14만 명쯤 되는 블로그가 있고, 거기에 필요한 사진 자료, 여기저기 정보를 찾는 일. 뭐 대충 그런 일 정도이다. 암만 그래도 활용을 잘 하는 이들의 양만큼은 따라가지 못한다. 그 정도인데도 컴퓨터는 힘겨운 모양이다. 전원을 넣고 부..

올해엔 좀 새로워져야겠다

올해엔 좀 새로워져야겠다 권영상 올해는 내가 좀 달라져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직장을 마치고 나온지 오래됐다. 직장이 없다는 생각 때문인지 옷은 직장에 다닐 때 입던 것들을 이것저것 가려 입는다. 뭐 특별히 사람 앞에 나설 일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직장 다닐 때 입던 옷이라고 새로 사는 옷보다 못하지 않다. 멀쩡하다. 오히려 그 무렵의 옷들이 요즘 옷보다 더 탄탄하고, 품격 있다. 나는 그런 구실을 대며 오랫동안 지난 시절의 옷을 입고 살았다. 그러면서도 어쩌다 새 옷을 사 입으면 기분이 다르다. 전화를 걸어 누군가를 만나고 싶고. 그와 멋진 커피숍에서 커피를 마시거나 점심이라도 함께하고 싶다. 그를 만나면 나는 싱겁게 자꾸 웃을 테고, 별일 없으면서도 사람들 붐비는 곳을 찾아가 어깨에 힘을 넣고 걸을..

폭풍우 치는 밤의 오두막집

폭풍우 치는 밤의 오두막집 권영상 폭풍우가 거세게 몰아치는 밤입니다. 비를 피해 염소 한 마리가 간신히 오두막집에 찾아들었습니다. 아, 안심이다! 하는 그 순간, 발목을 삔 늑대 한 마리가 이 깜깜한 오두막집에 찾아들었습니다. 서로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깜깜한 오두막집에서 둘은 그렇게 만났습니다. “당신이 와서 마음이 한결 놓이네요.” 염소가 어둠 속 그를 향해 말했습니다. “천둥 치는 밤에 이런 오두막에 혼자 있었다면 나라도 좀 불안했을 거예요.” 늑대는 어둠 속 그의 마음을 이해할 것 같았습니다. “어디 사세요?” 염소가 묻는 말에 늑대는 바람골짜기에 산다고 했습니다. 그 말에 염소는 잠시 놀랍니다. 거기는 늑대들이 모여 사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바람골짜기가 위험하지 않느냐고 염소가 물었습니다. 조..

시간을 새로 구입하다

시간을 새로 구입하다 권영상 “선생님, 줌 회의 들어가기 전에 잠깐 인사 말씀 좀 해 주세요.” 담당자가 회의 하루 전에 내게 부탁을 했다. 나는 선뜻 대답하고 짤막한 인사이긴 해도 할 말을 준비했다. 그리고 다음 날 2시간 전. ‘오후 7시 회의니까 10분 전에 들어와 주세요.’라는 문자가 왔다. 내 탁상시계가 회의 시작 15분 전을 가리킬 때다. 나는 담당자의 요구대로 10분 전에 들어가기 위해 주방으로 나가 냉장고 물병에서 물 한 컵을 따라 들고 들어오며 얼핏 거실 벽시계를 봤다. 이게 어찌된 일인가. 시계는 7시 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부랴부랴 내 방으로 들어와 다시 탁상시계를 봤다. 10분전이 되려면 아직 4,5분은 더 있어야 했다. 휴대폰을 켰다. 머리가 아뜩해졌다. 회의 시간은 이미 6분이..

고물 장수에게 고물을

고물 장수에게 고물을 권영상 늦은 아침을 끝내고 났을 때다. “고물 삽니다. 고물.” 요 앞길로 지나가는 고물장수 트럭의 스피커 소리가 났다. 여섯 집이 모여 사는 을씨년스런 시골 아침이 그나마 파랗게 살아나는 느낌이다. 아니, 그렇게 한가할 때가 아니다. 나는 문을 열고 나가 ‘여기요!’ 하고 트럭을 불러 세웠다. 금방 내 목소리를 듣고 트럭이 멈추었다. “접시 안테나도 받나요?” 대답 대신 트럭이 우리 집 쪽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그 사이, 나는 이층 발코니에 뽑아 놓은 접시 안테나를 들고 내려왔다. 일부 부식의 기미가 있는 곳도 있지만 전반적으로 새것처럼 탄탄했다. 고물장수 아저씨가 쇠막대기로 접시 안테나를 툭툭 치더니 ‘그냥 주세요’ 한다. 그 말에 나는 반색하며 받아주시는 것만도 고맙다며 성큼 ..

내 마음의 샹그릴라

내 마음의 샹그릴라 권영상 그에게서 문자가 왔다. ‘우리에게 언제쯤 마주할 기회가 주어질까. 그때까지 건강에 유의하기 바라네.’ 보내준 노래 잘 들었다며 곡조도 좋지만 가사도 좋다고. 추워지는데 잘 지내라고 보낸 내 문자 메시지에 대한 대답이다. 그는 5년 전 대장암 수술을 받았다. 그 후 탈 없이 조심조심 지냈으니, 어느 정도 안심해도 좋은 때에 와 있다. 그는 고등학교 친구다. 그도 나처럼 남들보다 두어 살 많은 나이에 다녔으니, 어쩌면 그런 사정으로 서로의 마음이 깊이 닿아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도 그때뿐. 졸업과 동시에 나는 그 시절의 일을 까마득히 잊고 살았다. 그 후, 오래 다니던 직장도 물러났다. 그러고도 오랜 시간이 더 흐른 뒤의 어느 날이었다. 그에게서 문득 전화가 왔다. 그때가 ..

그 게임은 길고 힘들었다

그 게임은 길고 힘들었다 권영상 연말 모임 시즌이다. 나는 벌써 몇 번의 연말 모임을 가졌다. 그러고도 몇 번의 모임이 더 남았다. 모임이라 해 봐야 주로 식사 모임이며, 아쉽게 흘러가는 시간에 미력하나마 힘을 보태는 정도이다. 여러 번의 모임 중에서도 모 초등학교 체육관에서 가진 모임은 좀 특별하다. 주최측에서 딱 서른 명만 초대했다. 모여 술을 마시느니 재미난 게임으로 한 해 동안 쌓인 스트레스를 풀자는 취지였다. 간단한 의식이 끝나자, 게임을 지도해 주실 분을 소개했다. 초등학교 선생님이었다. 그분은 서른 개의 의자에 앉은 우리를 그대로 15명씩 홍팀과 청팀으로 나누었다. 그리고 몸에 큰 무리가 가지 않는 초등학생 수준의 게임을 시작했다. 처음 게임은 동그란 색판을 뒤집는 게임이었고, 두 번째는 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