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미닫이문 여는 소리
권영상
오전 여섯 시 반쯤,
다르르, 울리는 미닫이문 소리에 긴 잠에서 눈을 뜬다. 겨울이라 그 무렵의 방안은 아직 어둑신하다. 새벽이라면 아직 새벽이고 아침이라면 이른 아침인 겨울날이다. 나는 방안 벽에 걸린 시계를 본다. 예의 그 시각이다. 여섯 시 반경.
미닫이문 여는 소리는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사는 아파트 옆집에서 나는 소리이다. 이때면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 댁의 누군가가 잠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연다. 밤사이 방 안 공기를 내보내고, 서늘한 새 공기를 받아들이려는 모양이다.
다르르, 창호문 바퀴가 레일을 따라 굴러가는 소리에 방안도 울리고 내 마음도 울린다. 방금 눈을 떴으니 잡념 하나 있을 리 없는 텅 빈 내 몸이 고요히 울린다. 그 소리는 바람처럼 가벼우면서도 맑다. 때로는 아득히 고향의 아침 시간을 흔들기도 한다.
아파트 구조상 이 방엔 집집마다 미닫이 격자무늬 창호문이 있는 모양이다.
나는 몇 해에 한 번씩 마음이 내키면 고향에서 창호문에 문종이를 바르던 내력이 있어, 묵은 종이를 물에 불려 떼어낸 후 새 창호지로 문을 바른다. 외부에서 몰아치는 풍우와 직접 닿지 않는 문이라 그런 수고를 들일 까닭이 없다. 하지만 팽팽하고 투명한 새 창호문에 햇볕이 환하게 어리는 모습을 본 기억이 나를 자꾸 수고롭게 한다.
창호문은 겨울이 깊어갈수록 그 값어치가 빛난다. 해가 남으로 깊이 기울면 자연히 햇빛이 방안 깊숙이 들어온다. 자연광은 연료로 덥힌 온기보다 더 따스하다. 투명하여 정신을 맑게 한다. 마음을 행복하게 한다.
깨끗한 창호문은 바깥소리에 예민하다.
잠자리에 누우면 밤바람에 날리는 마른 모과잎 소리가 들린다. 소복소복 눈 내리는 소리가 들린다. 아파트를 돌보는 분들이 밤새 내린 눈치는 소리가 들린다. 눈 가래가 바닥을 미는 소리나 두런거리는 말소리가 새벽이면 좋다.
차지만 바깥 공기가 맑은 6시경엔 귀가 더욱 예민해진다,
옆집 창호문 소리가 마치 내 방에서 나는 것처럼 가깝게 들린다.
그 댁 젊은 주인이 출근하려면 이 시각쯤 잠자리에서 일어나겠다. 다르르, 아침의 한 모퉁이를 깨우는 소리가 들을 때마다 예쁘다. 그러나 또 어떻게 들으면 그게 고단한 노동을 알리는 소리이기도 하다. 그 무렵 고향의 어머니는 부엌으로 통하는 작은 안쪽 문을 열고 나가 마당으로 난 대문을 삐걱, 여신다.
그 소리에 사랑방에서 주무시던 아버지는 소죽을 끓이러 나오시고, 어머니는 밥솥에 쌀을 안치고 유황 내 나는 성냥개비를 그어 아궁이에 불을 붙이신다. 소죽이 푹 익어가는 틈을 내어 아버지는 오랍뜰에 나가 지난날에 다 마치지 못한 식전 일을 하신다. 그동안 어머니는 아침 밥상을 차리기 위해 또 얼마나 분주해야 하시는가.
아침 여섯 시 반, 출근 직전의 그 시간은 내게도 바빴다.
세수를 마치고 옷장 앞에 서면 항상 머리가 복잡해졌다. 옷은 많으나 입고 나갈 옷은 언제나 마땅치 않다. 그러나 그 짧은 시간, 상의와 하의, 그리고 그들의 색상과 옷의 질감과 계절과 그날 날씨와 기분까지 빠른 시간에 고려하여 옷을 맞추어 입고 나갔으니 지금 생각해도 우리들의 머리는 빠르고 조화롭기까지 하다.
옆집 창호문 소리에 미적대던 나도 그만 일어난다. 그리고 세상에 신호를 보내기 위해 다르르, 내 방의 창호문을 연다. 또 하나의 우주가 열린다.
<교차로신문> 2024년 1. 25일자
'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먼 데를 바라보는 일 (3) | 2024.01.27 |
---|---|
세상을 보여주던 방솔나무 (1) | 2024.01.22 |
좀 기다리면 먹을 수 있단다 (1) | 2024.01.10 |
올해엔 좀 새로워져야겠다 (0) | 2024.01.05 |
폭풍우 치는 밤의 오두막집 (1) | 2023.12.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