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보여주던 방솔나무
권영상
고향에 가면 지금도 있다.
방솔나무. 두 아름드리는 될 성 싶다. 보통 소나무들처럼 미끈하게 위를 향해 뻗어 오른 게 아니라 어느 쯤에서 사방으로 가지를 펴 맷방석 같이 평평하게 얽혀 있다. 그 위에 올라가 눕는다 해도 전혀 발가락 하나 빠지지 않을 만큼 탄탄하다.
방솔나무는 마을의 뒤편, 호수가 펀하게 보이는 곳에 서 있다. 서 있는 방향이 마을의 북쪽이다. 정확하게 북쪽인지 모르겠으나 그쪽 방위를 가리키는 소나무라 하여 아마 방솔나무라 부른 것 같다. 나무는 7.80여년 생, 우람하다.
근데 그 나무를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서울에서 만나고 있다.
나무는 모 제약회사의 개방된 뜰 마당에 서 있다.
나는 아침이면 출근삼아 동네 산을 찾는데 도중에 남부순환로 건널목을 건너게 되어 있다. 가끔 길을 가다보면 건널목 코앞에서 보행신호가 정지신호로 바뀔 때가 있다. 나무는 그 다음 신호를 한가하게 기다리던 중에 우연히 만났다.
그 나무를 쳐다보면 마음이 편안하다. 마치 고향 뒤뜰의 방솔나무를 쳐다보는 것 같다. 나무의 크기와 높이와 맷방석처럼 잘 짜여 있는 둥근 나뭇가지들. 그 옛날의 고향 방솔나무는 어마어마하게 크다고 생각되지만 실은 여기 이 나무만했을 거다.
크다고 해 봐야 5미터 정도, 두 아름드리라 했지만 어른 한 아름쯤 됐겠다.
마을에서 한참 떨어져 있는 방솔나무가 우리를 유혹한 건 그네였다.
누군가 그네를 매어놓았는데 우리는 틈만 나면 그네를 타고 놀았다. 땅에서 태어나고 땅에서 자란 우리는 날아오르는 그네의 높이에서 세상을 잠깐씩 보는 재미를 느꼈다.
아이들이란 좀 별나서 언제나 그것에 만족하지 못했다. 결국 겁 없는 한 아이가 그넷줄을 타고 나무 우듬지로 올라갔다. 평평한 가지들을 밟고 선 그 아이가 소리쳤다.
“세상이 다 보여!”
그 말에 우리들은 마음이 들떴다.
대체 세상이 얼마만 하기에 다 보인다고 하는지. 위험하다면 매우 위험한 그넷줄을 타고 우리는 소나무 우듬지에 차례로 올라가 섰다. 거기서 바라보는 세상은 크고 넓었다. 호수가 한 눈에 들어왔고, 호수 너머의 멀기만 하던 마을이 보였고, 남쪽으로 내리달리는 아득한 산맥이 또렷하게 보였다.
우리는 허공을 향해 손나팔을 하고 외쳤다.
“야아아아!”
그때 우리는 알 수 없는 그 누군가를 불렀다.
어쩌면 아득한 그 너머의 세상과 만나고 싶었는지 모른다.
아무 대답도 듣지 못한 채 우리는 우리가 밟고 있는 평평한 나뭇가지 위에 차례로 누웠다. 하늘이 잡힐 듯 눈에 들어왔다. 땅에서 보던 그 하늘과 달리 둥둥 떠 있는 기분이었다.
저녁을 먹은 후에도 우리는 방솔나무를 찾았는데, 나무 위에서 누워 보던 밤하늘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수많은 별들과 길게 남으로 흘러가는 은하수, 꽁지를 그으며 알 수 없는 곳으로 날아가던 푸른 별똥별들.....
오늘도 초록 신호등이 눈앞에서 빨강으로 바뀐다.
나는 제약회사 뜰 마당에 선 방솔나무를 찾아가 한참 동안 고향을 떠올린다.
먼 옛날의 한 소년이 자라 지금 여기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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