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먼 데를 바라보는 일

권영상 2024. 1. 27. 12:29

 

 

먼 데를 바라보는 일

권영상

 

 

다락방은 정말이지 별 용도 없이 지어진 것 같다.

여름엔 너무 덥다. 그런 반면 겨울은 너무 춥다. 가뜩이나 다락방으로 연결된 온수 배관 파이프가 어느 추운 해 동파되는 바람에 아예 그 지점을 절단해 버렸다. 그러니 더우면 더워서, 추우면 추워서 다락방에 올라가지 않는다. 암만 생각해도 다락방은 별로 쓸모가 없다.

이 다락방을 왜 만들었는지 이 집을 지은 목수를 한때 탓했다, 그런데 가끔 다락방 발코니에 나가 먼 곳을 바라보면서 비로소 그 까닭을 조금씩 알아간다.

 

 

눈앞에 드러나는 논벌과 그 논벌 끝 비스듬한 산 언덕, 4월이면 복숭아꽃으로 붉게 물드는 그 산 언덕 과수원. 여기서 3킬로미터는 되겠다. 과수원 너머엔 첩첩이 산이고, 그 어느 먼 산엔 파란색 물류센터가 보인다. 그리고 그 너머는 아득한 하늘이다.

나는 발코니에 서서 그 먼 데를 바라본다. 물류센터 너머에는 모 식물원이 있을 테고, 그 너머는 백암이거나 그 어디쯤엔 영동고속도로로 진입하는 진입로가 있겠다. 그 고속도로를 따라 계속 가면 동해 바다가 나올 테고, 그쯤에 내 고향이 있다.

 

 

파란 바다.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 서면 가슴을 열 듯 수평선이 활짝 열리고, 그 너머에선 뭉게뭉게 뭉게구름이 핀다. 수평선 위로 피는 뭉게구름은 마치 우리가 살고 있는 이쪽 세상의 배경 같다. 그런 배경으로 우리는 생각하고, 사랑하고, 먹고사는 일에 빠지고, 좌절하다가도 다시 힘을 얻어 용솟음치듯 일어선다.

겨울이어도 나는 별일 없이 다락방 발코니에 나가 하얗게 눈 덮인 먼 산 언덕 복숭아 과수원을 바라보곤 한다. 내 시선이 거기까지 날아가 닿기만 해도 나는 좋다. 내 시선이 날아가는 그 공간만큼 내 마음의 여백도 커지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추운 밤이면 방안의 불을 다 끄고, 두툼한 점퍼를 입고, 목도리를 하고 발코니에 나가면 반갑게 나를 맞아주는 게 있다. 별들이다. 홀로 그 별들을 우두커니 바라본다. 여기 이 지구까지 별빛이 날아오는데 몇 억 년이나 걸린다는 그 먼 거리로 나는 내 눈빛을 보낸다. 북두칠성, 오리온, 카시오페이아, 목성, 그리고 이름도 모르는 먼 별들.

그들을 바라보면 빡빡하던 내 마음이 좀 헐거워진다. 틈이 생기고 여백이 생겨 누가 뭐래도 받아넘길 넉넉한 마음자리가 만들어져 좋다.

 

 

서울이라는 큰도시에 살면서 먼 곳을 바라보는 시선을 잃었다.

나만이 아니고 우리 모두 그렇다. 집들이 많은 도회지는 우리의 먼 시선을 모두 빼앗아 갔다. 집들 위로 멀리 바라보이던 성당의 지붕도 우리 사이에  빌딩이 들어서면서 사라졌다. 내가 좀 힘들 때면 종교와 상관없이 바라보던 그 성당의 지붕과 그 위를 날던 새들과 흰 구름은 내게 큰 위안이었다. 요즘은 내 눈길을 멀리 보낼 곳이 없다.

하늘이 한껏 열려 있던 우리 아파트 동편엔 35층짜리 아파트가 재건축되면서 우리가 바라보던 동쪽 하늘을 다 가져갔다. 우리는 가끔 그 아파트에서 절벽을 느낀다.

 

 

먼 데를 바라보지 못하면서 우리의 시선의 거리는 짧아졌고, 세상을 두루 이해하고 용서하던 마음의 여백도 사라졌다. 우리가 작고 사소한 일에 매달려 네 편 내 편 극렬하게 싸우는 일도 어쩌면 멀리 바라보는 힘을 잃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가끔 다락방 발코니에 나와 먼 데를 바라보면서 이 집을 지은 목수의 마음을 천천히 알아간다. 그분이 왜 하늘과 들판을 바라보기 좋은 여기에 발코니를 만들어 놓았는지.

 

 

교차로신문 2024년 2월 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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