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사람을 더 믿는 새들

권영상 2024. 2. 9. 13:53

 

사람을 더 믿는 새들

권영상

 

 

 

차를 몰고 다랑쉬오름을 향해 달려 갈 때부터다. 조금씩 내리던 눈발이 거칠어졌다. 오름 주차장에 도착했을 때는 겉잡을 수 없을 만큼 눈과 바람이 휘몰아쳤다.

“저기 저 조그마한 오름이나 가 보고 말지 뭐.”

아내가 눈보라 사이로 보이는 아끈다랑쉬 오름을 가리키며 굳게 다물었던 입을 열었다.

이런 날 다랑쉬오름을 오른다는 건 내가 보기에도 무리인 듯했다.

 

 

할 수 없지 뭐, 하고 차에서 내리는데 무슨 까닭인지 눈보라가 조금씩 누그러졌다. 나는 아내를 달래어 꼭 한번 가 보고 싶었던 다랑쉬오름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좁은 계단 길을 걸어 오를수록 바람은 제주 바람답게 거세었다. 달리 바람을 피해 오를 수 있는 길은 없어 보였다. 계단 길 주변의 나무들도 바람 때문인지 키가 작았다. 한참을 오르다가 바람도 피할 겸 계단 난간에 기대어 한숨을 돌리고 있을 때였다.

“요기 산새 둥지가 있네!”

아내가 팔꿈치 곁에 있는 산새 둥지를 가리켰다.

 

 

소복하게 눈이 쌓여있었다. 여기서 알을 낳고, 새끼를 키워낸 후 다들 떠나간 모양이다.

“사람 없는 으슥한 곳에 둥지를 틀지 왜 사람 다니는 길옆에 틀었을까.”

아내도 그랬고, 나도 그랬다.

우리는 그런 질문을 서로에게 하면서 오름을 올랐다. 오름의 바람은 사람을 날려올릴 듯 거칠고 힘이 세었다. 우리는 정상에 올라 바람을 타는 새매를 바라보다가 그만 내려왔다.

 

 

제주에서 돌아와 오늘은 집에서 가까운 양재동 꽃시장에 들렀다.

창밖 중국단풍나무를 다른 곳으로 옮기기 위해 적당한 대목을 찾으러 갔다.

산딸나무인 줄 알고 사다 심은 나무가 나중에 알고 보니 중국단풍나무였다. 10년 전에 마음에 품었던 생각대로 산딸나무를 구할까, 하는 마음으로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주차장 사이 사이엔 구획을 지어놓은 어린 느티나무들이 서 있었는데, 내가 차를 세운 곳의 느티나무에 놀랍게도 큼직한 까치집이 있었다.

 

 

“아니, 세상에!”
손 뻗으면 닿을 높이에 지어놓은 까치집은 처음이다.

그들은 내가 저들 둥지 바로 아래에 차를 세우는 데도 나에게 아무런 경계의 빛을 보이지 않았다. 그냥 저들끼리 앉아 놀다가, 느티나무 위 하늘을 날다가, 다시 내려오곤 했다.

어찌 보면 뭔가 사람을 믿는 눈치다.

이들이 이곳에 집을 지은 데는 까닭이 있겠다. 번잡하게 차량이 드나든다 해도 그들의 목숨을 위협하는 매나 독수리보다 그래도 사람을 더 믿기 때문이 아닐까. 사람의 손이 순간, 무서운 일을 저지르긴 해도 그래도 사람 그 자체를 믿는 것 같았다.

 

 

그때에야 다랑쉬오름 길에서 만난 산새 둥지가 떠올랐다. 제주는 울릉도와 같은 화산섬이지만 뱀이 살고 있다. 그리고 바람을 타는 무서운 산매가 있다. 거기 사는 작은 산새들에게 있어 사람은 뱀이나 매보다는 그래도 믿을만해 길옆에 둥지를 틀었을지 모른다.

 

 

가까운 곳에 숲을 두고도 굳이 사람이 오가는 뜰안 우체통에 둥지를 트는 곤줄박이나 박새 마음도 알겠다. 사람이 서로 경쟁하고, 서로 밀치고, 서로 시기하고, 서로 얼굴 붉히며 산다거나 또는 자연을 훼손하며 사는 듯 해도 그래도 작은 새들 눈엔 사람이 사람답게 보이는 모양이다. 못 됐다 못 됐다 해도 자연은 사람을 믿는다.

 

교차로신문 2024년 2월 1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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