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물려받는 옷

권영상 2024. 2. 22. 12:02

 

 

물려받는 옷

권영상

 

 

 

처형이 왔다.

이사 가기 전에 옷 정리부터 한다며 아내에게 물려줄 옷 한 가방을 들고 왔다. 그 옷을 넘겨주고 넘겨 받느라 지금 안방이 떠들썩하다. 언니 옷을 받아 입는 것이 뭐가 그리 좋은지 웃음소리도 끊이지 않는다.

나는 타인의 옷을 물려받거나 물려준 경험이 없다.

 

 

손위로 누님이 세 분이다 보니 물려받을 옷이 없었고, 내 체격이 우리나라 표준 체격이 아니다 보니 누가 옷을 물려준다 해도 내 몸에 맞을 리 없었다. 장갑이며 신발도 표준 크기로는 어림없었다. 기성품 옷 가게나 기성품 신발 가게는 나와는 너무 멀었다.

지금도 운동화 하나 구하려면 온 식구가 총 동원된다. 오프라인 신발 매장에서부터 온라인 매장까지 불을 켜고 뒤진다. 몇 번의 주문과 몇 번의 반품이 되풀이 되어야 간신히 구매한다. 그때마다 나는 자책한다.

 

 

“모두 너무 큰 나 때문이야.”
나는 내 몸에 대해 별나게 부정적이다.

처음 보는 이들 앞에선 큰 손을 숨기고, 큰 발을 숨기고, 큰 얼굴을 숨기기 위해 수염을 길러 공간을 좁혀보려 애쓴다. 체격이 큰 사람을 위해 마지못해 만든, 가장 볼품없고, 가장 보편적이고, 가장 촌스럽고, 가장 개성 없는 색상과 가장 밋밋한 디자인의 기성복을 입으며 살아오느라 나는 고역이었다. 내가 그랬으니 그 옷을 누구에게 물려주겠는가.

근데 체구가 크지 않은 아내는 언니 옷을 물려 입거나 자신이 입던 옷을 직장 동료들에게 물려주거나 이웃집에 물려주는 일을 다반사로 여긴다. 손 위로 언니가 다섯이니까 언니들의 옷을 물려받아 입어온 좋은 경험 때문인 듯 하다.

 

 

오랫동안 그런 일에 익숙해서일까.

딸아이에게도 옷을 물려받는 문화를 넘겨주었다.

딸아이는 배내옷을 빼고는 세살 차이의 제 이종사촌 오빠의 옷을 고스란히 물려받아 입었다.

“아니, 좀 크면 몰라도 아기 때부터 얻어 입혀?”

나는 물려받는 일을 ‘얻어 입는다’고 생각했다. 내게는 그런 문화가 너무도 낯설었고 너무도 익숙치 않았다. 하지만 나도 금방 적응이 됐다. 물려받은 옷이 새 옷보다 더 질감이 부드럽고, 무엇보다 옷에서 다정한 친밀감이 느껴진다는 것을.

 

 

성별이 뚜렷하지 않은 유아기 옷을 물려받아 입으면서 자란 탓인지 딸아이는 별 저항감 없이 제 이종과 가까이 지냈다. 인형놀이보다 자동차 놀이를 좋아했고, 제 이종이 즐겨 부르는 팝송을 저도 즐겨 부르며 성장했다.

알게 모르게 딸아이는 남자아이가 되어갔다. 여자 친구보다 남자 친구가 많았고, 말투도 남자처럼 투박한 데가 있었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세상이 점점 성평등 문화로 바뀌어간다는 점이었다. 가르치려 해도 못 가르칠 남성 취향을 딸아이는 자연스럽게 물려받았다.

 

 

조용하던 안방문이 열리면서 아내가 나왔다.

“어때?” 못 보던 자켓에 무릎까지 내려오는 스커트를 입고 쓱, 허리를 편다.

내 대답이 떨어지기도 전에 무슨 모델이나 된 것처럼 쓱, 돌아서 보인다.

“예쁘지요?” 처형이 뒤따라 나와 아내가 입은 옷의 허리춤을 조여준다.

나는 대답했다.

“예쁘네요 뭐.”

 

교차로신문 2024년 2월 22일자

'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봄을 준비하다  (4) 2024.03.07
안경이 사라졌다  (0) 2024.03.02
빛바랜 사진 액자  (0) 2024.02.15
사람을 더 믿는 새들  (1) 2024.02.09
꽃씨를 보내는 사람  (0) 2024.0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