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안경이 사라졌다

권영상 2024. 3. 2. 11:35

 

안경이 사라졌다

권영상

 

 

 

안성에 내려가 며칠 머물다 올 걸 생각하고 가방을 쌌다.

책을 골라 넣고, 아내가 만들어준 반찬 가방을 들고 집을 나서려고 보니 안경이 없다. 가방을 내려놓고 입었던 옷을 뒤져보고, 책상 주변을 살피고, 혹시나 싶어 휴지통도 들여다봤지만 없다. 차에 두고 내렸나 싶어 차 안을 살폈지만 차에도 없다.

나중에 다시 살펴볼 테니까 어여 가라는 아내의 말에 차를 몰고 아파트를 나섰다.

 

 

참 이상한 일이다.

어제 오후까지 분명히 안경을 쓰고 있었다. 그날 오후, 고장 난 블랙박스를 교체하기 위해 블랙박스 가게 주인이 왔었다. 나 말고도 아파트 주민 중에 블랙박스를 교체하는 분들이 있어 직접 아파트로 오겠다고 했다.

블랙박스 사용법을 자세히 알아보려고 안경을 쓰고 마당에 내려갔었다.

햇볕이 봄날 같이 따스했다.

 

 

그분이 교체하는 동안 나는 아파트 철쭉 숲 위로 떨어진 나무 삭정이들을 치웠다. 머지않아 철쭉이 피려는지 꽃망울이 통통했다. 아파트를 관리하시는 분들 덕에 해마다 봄이면 철쭉꽃이 눈부시게 핀다. 삭정이뿐이 아니다. 가지 사이에 끼어든 마른 목련 잎이며 전지해 놓은 뒤 미처 치우지 못한 은행나무 가지들을 들어내어 나무 쓰레기장에 버렸다.

그러는 동안 블랙박스 교체가 끝났다.

 

 

나는 그분이 시연해주는 사용법을 눈여겨 본 뒤 그분과 헤어졌다.

가만히 생각하니 그분이 알 것 같았다. 안성에 도착하는 대로 그분에게 전화를 드렸다.

“민망한 말씀인데, 그날 제가 안경을 쓰고 있었는지 한 번 생각해봐 주시겠어요?”

나의 황당한 질문에 그분이 ‘기억이 잘 안 나네요’ 했다.

아내도 그날 잠깐 마당에 내려왔었는데 내가 안경 쓴 걸 못 보았다는 거다.

“춘천 어딘가에 놓아두고 그냥 왔을 거야.”

아내는 나의 과거 행적을 떠올리며 춘천을 들먹거렸다.

 

 

춘천은 그 하루 전날, 볼일이 있어 버스를 이용해 다녀왔었다. 춘천버스종합터미널에 내려 나를 태우러온 분의 승용차를 타고 가 회의를 하고, 돌아오는 길에 함께 간 낯선 젊은 분과 저녁 식사를 한 게 전부다.

“그러니까 앉았다 일어설 때마다 지갑, 휴대폰, 안경 꼭 챙기라 했잖아, 그거 잘 하라고 그렇게 말하는데 참 안 되네."

아내는 물건을 잃어버리고 다니는 내 부주의를 꼬집었다.

 

 

“아니, 어제 블랙박스 교체할 때 안경 썼다고. 이건 분명한 사실이야.”

그런 말을 하면서도 나는 이렇게 말하는 내가 의심스러웠다. 정말 안경을 썼는지, 주머니에 넣고 다닐 때 내 몸에 느껴지던 느낌이 사실이었는지 아니면 단지 느낌이었는지.

나는 나를 의심하며 차 안 여기저기를 다시 살폈지만 여전히 안경은 없었다.

 

 

점심 무렵 아내한테서 전화가 왔다.

안경을 찾았다는 거다. 혹시나 하고 관리소에 전화를 했던 모양이다. 철쭉숲에서 봤다는 직원이 있어 그분을 따라 갔더니 거기 가지런히 놓여있더라고 했다.

나는 휴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안경을 찾았대서가 아니라 그날 안경을 썼다는 내 기억과 느낌이 틀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건 또 얼마나 기분 좋은 일인가.

 

교차로신문 2024년 2월 2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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