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나무가 붉게 꽃 피다
권영상
남부순환로 앞에 서면 내 눈이 건너편 산으로 간다. 신호를 기다리며 먼데 산을 바라보는 일은 좋다. 특히 이맘쯤 북향의 산비탈은 더욱 좋다. 거기엔 남향보다 북향을 좋아하는 나무숲이 있기 때문이다. 생강나무, 진달래, 귀룽나무, 오리나무 등이 그들이다.
이들 나무는 대개의 나무들과 달리 남향을 꺼린다. 남향엔 무제한으로 받을 수 있는 햇빛이 있지만 햇빛 때문에 수분이 머무는 시간이 짧은 게 문제다. 그런 탓에 이들 나무는 햇빛보다는 물기를 머금고 있는 서늘한 북향을 가려 산다.
요사이 산을 바라보면 산빛이 붉다.
정확히 말하면 자주에 가까운 붉은빛이다. 오리나무가 개화하기 때문이다. 오리나무도 꽃 피냐 하겠지만 오리나무도 꽃 핀다. 말은 쉽게 하지만 나도 오리나무꽃은 보지 못했다. 길다랗게 늘어진 수꽃 수술 어디에 꽃이 숨어 있는지 잘은 모르겠다. 다만 우련한 자주빛으로 보아 지금 오리나무꽃이 피는구나 한다.
이 산에서 처음, 오리나무를 만날 때 나는 울컥했다. 이 가난하고, 헐벗고, 볼품없고, 별 쓸모없어 보이는 나무가 문득 고향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오리나무는 사람으로 치자면 서민 축에 드는 나무다. 아니, 그에게 서민이라는 말은 옳지 않다. 들풀보다 낮고 힘없는 민초 축에 드는 나무다. 오리나무가 지금 내 말을 듣는다면 좀 서러워하겠지만 실상 그는 있으되 없는 듯한 나무다.
고향 호수를 내려다 보는 산자락에 우리집 골논 한 배미가 있다.
아버지는 산에 눈이 녹으면 논에 물을 받아 논둑을 수리하셨다. 골논은 천수답이라 가두어놓은 물이, 말라 금이 간 논둑으로 새어 나가면 낭패다. 그걸 막으려고 아버지는 차가운 논물에 들어서셔서 젖은 흙으로 논둑을 단단히 하셨다.
어린 나는 아버지 점심을 가져가시는 어머니를 따라 그곳에 가곤 했다. 아버지가 점심을 드실 동안 어머니와 나는 오리나무 껍질과 가지와 열매를 주워 아버지 발이 시릴까봐 불을 피워드렸다. 아버지는 그 불로 발을 녹이고 다시 논물이 들어가셨다.
지금 생각해 보면 만만한 게 오리나무다.
나무가 멋들어지고 수려하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서까래 감이라도 되냐 하면 그것도 못 된다. 고추밭의 말뚝감으로는 어떠냐 하지만 그에겐 그런 번듯함이 없다. 목질이 약하고 잘 부러져 어디에도 쓸 형편이 못 된다.
살아있는 나무 둥치를 들여다보면 나무벌레 이빨에 구멍이 숭숭하다. 다만 한 가지 목질이 붉어 목가구로 좋다 하지만 목가구가 될 만큼 한 자리에 오래 살아남지 못한다.
어찌보면 인생이 딱한 나무가 오리나무다.
소나무는 함부로 벨 수 없으니 땔감의 고충을 오리나무가 대속한다. 제일 먼저 도끼날에 찍혀 빈자들의 차가운 방구들을 덥힌다. 그러면서도 사람들 인식 속엔 별 소용 없는, 있으나 마나한 나무다. 멀쩡히 소용에 닿으면서도 고마움을 못 느끼는 민초같은 나무다.
들판에 잡초가 있다면 산에는 잡목이다.
잡목이라하면 오리나무도 기꺼이, 눈물겹지만 그들 속에 끼어들기를 바랄 거다.
지금 나는 우면산 오리나무 군락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이 투박하고 볼품없는 나무가 다른 어느 나무보다 더욱 정이 가는 건 무엇 때문일까. 아버지의 시린 발을 덥혀드리던 나무이기 때문일까. 오리나무 꽃핀 수술들이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린다. 오리나무 꽃이 지면 이 산도 본격적으로 연두빛 봄빛에 물들 테다.
교차로신문 2024년 3월 1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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