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밤, 산장의 여인
권영상
“아무도 날 찾는 이 어없는.”
우리가 앉은 탁자 건너 건너편 여자분이 ‘산장의 여인’을 또 부른다.
부르긴 하지만 한 소절, 그쯤에서 노래를 그친다. 그리고는 음식점에서 노래 부르는 게 미안했던지 우리를 바라보며 “손님, 미안합니데이.” 한다.
반쯤 술에 취한 목소리다.
합석한 여자분이 언니, 올해 몇인데 손님 있는 음식점에서 노래 불러? 하며 농을 한다.
“내가 몇 번 말해줘야 아냐? 이 언니가 소띠라구! 소띠!”
두 분은 우리가 이 음식점에 들어오기 전부터 술을 마시고 있었다.
아내와 나는 동해안 사천에 일이 있어 내려왔다가 1박을 할 생각으로 여기 속초까지 왔다. 밤 8시 30분. 물치항 생선회 센터를 찾아가다가 혹시 싶어 이 불켜진 매운탕 음식점 안을 들여다봤다. 손님 두 분이 있었다. 다행이다 싶어 문을 열었다.
여자 두 분은 식사가 아니라 술을 마시고 있었다.
나는 아내와 함께 그들과는 좀 떨어진 자리에 앉았다.
“아무도 날 찾는 이 어없는.”
칠십 중반의 그 소띠 여자분이 노래를 부르다 말고, 우리를 보며 또 “손님, 미안합니데이.” 한다.
나는 음식을 시키며 “괜찮습니다. 기분 좋으신가 본데, 노래 부르세요.” 그러며 아내를 봤다.
아내가 싱겁게 술 취한 사람 말에 끼어들지 말라는 눈치다.
창밖은 컴컴할 대로 컴컴한 밤,
이 낯선 동해안 작은 항구 근방의 음식점에서 듣는 여자분의 노랫소리가 싫지 않았다. 바닷가 마을에서 오래 사신 듯 그분의 얼굴에 고된 삶의 흔적이 배어있었다.
이윽고 마음씨 좋아 보이는 여주인이 우리가 주문한 해물탕 냄비를 들고 왔다.
아내가 재료가 무슨 생선이냐고 물었고, 여주인은 이 근방에서만 나는 망치며 장치라고 일러줬다. 그러면서 “우리 언니가 오늘 생신이라 한잔하는 겁니다. 이해해 주소.” 했다.
“아, 생신요! 적적한 봄밤에 부르는 노래. 듣기 좋네요.”
내 말을 들었는지, 소띠 여자분이 또 그 ‘아무도 날 찾는 이 어없는’을 불렀다.
우리의 식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두 분은 식당 여주인하고 길 건너편 술맛 좋은 집으로 생신 축하주 한잔 더 하러 간다며 일어섰다.
“얼굴도 예쁘시고, 노래도 잘하시던데 제대로 한 곡 부르고 가세요.”
그때였다. 뜻밖에도 아내가 소띠 여자분의 걸음을 멈추어 세웠다.
그분이 선 채 ‘산장의 여인’을 불렀다.
아내도 나도 그분의 노래를 따라 불렀다. 합석했던 친구분도, 음식점 여주인도 함께 장엄하게 불렀다.
노래를 마치자, 우리는 그분을 위해 힘찬 박수를 보냈다.
이윽고 그분들은 ‘술맛 좋은 집’으로 나갔다. 그리고 방에 있던 남자 주인이 나왔다.
식사하시는데 소란 떨어 미안하다며 우리에게 그 연유를 귀띔했다.
소띠 여자분이 50년을 넘게 알고 지내는 사이라는 것과 그분의 남편이 풍으로 요양원에 가신 지 2년이나 됐다는 걸 말했다. 그제야 그분이 ‘아무도 날 찾는 이 없는’을 부르고 또 부른 까닭을 알게 됐다.
늦은 저녁 식사를 마치고 음식점을 나왔다.
숙소로 돌아오며, 생일 축하주를 서로 권하며 어디선가 ’산장의 여인‘을 부르고 있을 여자분들의 봄밤 정취를 떠올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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