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생각이 싫은 날

권영상 2024. 5. 8. 10:26

 

 

생각이 싫은 날

권영상

 

 

생각하기 싫은 날이 있다.

그 동안 복잡한 생각에 시달리며 살아왔다. 글 쓴답시고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일생을 진절머리가 날 만큼 생각에 끄달리며 살다.

오늘은 안성집 데크에 페인트칠을 해야 하고, 토마토며 고추 모종을 해야 한다. 나는 동네 페인트 가게에 들러 목재 보호용 오일 스테인 4리터짜리 두 통을 주문했다. 주인은 내가 주문한 페인트 통의 뚜껑을 열고 내용물을 잘 섞은 뒤 다시 뚜껑을 덮어 내게 내밀었다.

 

 

나는 그걸 차에 싣고 안성을 향했다.

1시간을 달려 백암 장터 근방에 차를 세우고 모종을 샀다. 토마토와 고추, 가지, 오이 등속을 종이상자에 넣어주는 대로 들고 와 차에 실었다. 그리고 상자 위에 신문지를 덮고 마트에서 산 양배추 한 덩이를 얹었다.

점심을 해결하고 가기 위해 설렁탕집에 들어섰다. 자리가 많이 비었다. 그 중 한 자리에 앉았다. 옆 의자에 마스크를 벗어놓고 시킨 음식을 한참 들고 있을 때다. 아내에게 점심을 먹고 있다는 문자 메시지를 보내야 될 것 같아 휴대폰을 찾았다. 없다. 있어야할 지갑도 없다.

 

 

식사하다 말고 일어섰다.

지갑을 어디다 놓고 온 것 같아요.”

나는 주인에게 말했고, 주인은 생각 없는 나를 알아본 모양인지 암말이 없었다.

나는 허겁지겁 장터로 달려가 내가 다니던 모종가게와 시장 통을 돌았다. 어디에도 없었다. 세워둔 차로 왔다. 운전석에 휴대폰과 지갑이 놓여있었다.

서둘러 음식점으로 갔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서 주인에게 허리를 숙여 돌아왔다는 인사했다.

 

 

남은 음식을 먹고 나와 길을 건널 때다.

옆 의자에 벗어두고 온 마스크가 생각났다. 가지러 가려고 돌아서는 나를 내가 막았다. 마스크를 찾으러온 나를 보면 주인은 또 나를 뭐라 생각할까 싶었다.

불과 몇 시간 사이 자꾸 이상해지는 내가 보이기 시작했다.

차를 몰아 안성집에 도착했다.

 

 

접이식 휴대용 손수레를 내려 페인트 한 통을 세워 실었다. 그리고 그 위에 나머지 한 통을 얹고 나는 습관처럼 손수레를 기울여 끌었다. 순간 위에 얹은 페인트 통이 미끄러지며 땅바닥에 굴러내렸다. 뚜껑이 열리며 페인트가 콸콸 쏟아져 나왔다.

내가 대체 왜 이러지!”

나는 재빨리 페인트 통을 일으켜 세웠다.

손수레를 기울이면 위에 얹은 페인트 통이 미끄러진다는 사실은 생각을 할 때만 가능하다.

산다는 일은 생각의 산물이다. 우리는 살아내기 위해 수없이 많은 생각을 떠올리거나 끄집어내거나 머리를 쥐어짜내며 하루라는 강을 건넌다.

 

 

순간순간이 다 그렇다.

다시 태어난다면 돌멩이가 되겠다는 어느 젊은 가수의 말이 생각난다.

생각에 시달리는 일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그런 말을 했을까.

페인트 통을 나르고 다시 양배추를 들어 올리는 데 보니 양배추 무게에 고추 모종이 짓눌려 4포기나 부러져 있다. 고추 모종 위에 신문지를 덮었다 해도 그 위에 무거운 양배추를 얹으면 모종이 다친다.

 

 

이런 날, 나는 내가 유치원 아이 수준으로 떨어지는 걸 본다.

그 동안 부족한 머리로 너무 많이 생각하며 살았다.

오만가지 생각에 시달리거나 끄달리며 살았다.

오늘 하루만이라도 생각에서 벗어나자고 한 일이었는데 하는 일마다 어이없는 부주의로 이어진다.

생각을 좀 덜어내며 살아야겠다. 머릿속에 가득차 있는 쓸데없는 생각들을 추려내야겠다. 생각할 때 간단히 생각하고, 먹을 때 간단히 먹고, 일할 때 간단히 일하고, 놀 때 간단히 노는 인생을 살아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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