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를 듣는 밤
권영상
창밖에 쪼매만한 상현달이 떴다. 테두리 흔적만 남은 명주실 같이 가는 달이다. 시계를 보니 9시 무렵.
나는 어린 상현달에 끌려 다락방에 올라가 창을 열었다.
집이 동향이니 달이 보일 리 없다. 대신 건너편 산으로 부는 컴컴한 참나무 숲 바람 소리가가득 밀려온다. 숲 바람은 피아노 연주곡처럼 한 차례 소란스럽게 다가와서는 다시 잠잠해지고, 잠잠해지다가 다시 소란을 떤다.
나는 휴대폰에서 쇼팽의 녹턴을 꺼냈다.
참나무 초록물이 잔뜩 든 밤바람 소리를 배경으로 피아노 소곡이 잘 어울릴 것 같았다.
시작 버튼을 누르고 어두컴컴한 숲을 바라본다.
음악을 열면 음악에 빠지기보다 오히려 긴 상념에 빠진다.
나이를 먹어 더욱 생각이 많다. 나의 상념은 음악을 겉돌게 한다. 구성이 복잡할수록 더 그렇다. 그림도, 시도, 음악도, 메시지가 불거지는 건 싫다. 집중력이 떨어지다 보니 점점 간소한 게 좋다.
쇼팽의 녹턴도 가급적 백건우의 녹턴이 좋다.
한 음 한 음, 마치 시인이 시어를 고르듯 고뇌하며 건반을 다루는 그의 손에는 언제나 달밤의 정취가 고요하게 묻어있다. 다문다문 뜨는 별처럼 건반 위에서 발아하는 그의 피아노 소리는 담백 그 자체로 좋다.
젊은 시절엔 피아노곡에 흥미를 가져본 적이 없다.
무미해서 싫었다. 담백보다 욕망이 담겨있는 것일수록 좋았다. 좀 뜨겁거나 혁명적인, 침울하려면 무너질 듯이 침울하고, 화려하려면 금속악기처럼 화려한 음악이 좋았다.
나이라는 걸 먹고 보니 소박하고 단순한, 음과 음 사이에 거리가 좀 느껴지는 여백의, 약간 촉촉한 피아노 소곡이 좋아졌다.
이제는 ‘전쟁과 평화’니 ‘신곡’이니 ‘죄와 벌’을 못 읽는 것과 같다. 장편소설 못지 않게 음악을 듣는 일에도 힘이 필요하다.
그러나 녹턴은 그와 달리 잘 쓴 시처럼 간명해서 별다른 노고가 필요하지 않다. 녹턴은 솔직하다. 음 사이의 거리가 있어 내가 살짝 끼어들 수 있다. 창문을 때리는 빗방울처럼 잠든 내 의식을 때린다. 그러나 아프지 않다.
다 듣고 나도 좋다.
풀잎을 딛고 가는 빗방울 자국처럼 아련히 마음에 흔적이 남는다. 입술에 남은 테마를 읊조리는 나를 보며 이 세상에 와 있는 나를 발견한다.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고, 진중하지도 그리 절박하지도 않은 또박또박 걸어가는 피아노 소리는 분명 창밖 소란스러운 참나무 숲 바람소리에도 듣는 데 불편이 없다. 건반과 현의 어울림이랄까.
늦은 오후면 바람이 온다.
데크에 나가 참나무잎들이 내는 음악을 듣는다. 얼씬거리는 나를 느꼈는지 길 건너 파란지붕집 개가 컹컹 짖는다. 고추밭에서 밤 고양이가 야옹, 한다. 개구리들이 울고, 검은등뻐꾸기가 운다. 이 밤, 수원집 컴컴한 창문에 연두색 불이 딸깍 켜진다.
집에서 먼 여기 안성에 내려와 초여름 밤이 들려주는 야외의 소곡을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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