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빛바랜 사진 액자

권영상 2024. 2. 15. 23:23

 

 

 

빛바랜 사진 액자

권영상

 

 

 

너무 성급한가? 왠지 봄 느낌이다.

순간 청계산 매봉이 떠올랐다. 나는 집을 나섰다. 양재역 근처에서 안양행 버스를 타고 인덕원에서 내렸다. 거기서 다시 청계사로 가는 택시를 탔다. 청계사에서 원터골로 가는 코스를 몇 번 산행해 본 경험이 있다.

청계사 주차장에서 내려 매봉을 향해 부지런히 걸어 올랐다.

 

 

이미 산도 봄 느낌이다. 생강나무 꽃눈이 노랗다. 길옆에 쌓인 가랑잎을 들추니 봄이 파랗게 숨어있다. 오랜만에 왔지만 산은 그대로다. 그때 그 바위를 타고 오르던, 척박한 바위 사이로 뿌리내리며 살던 그 다복솔 숲을 지나 매봉에 올랐다.

멀리 뿌연 하늘을 바라보려니 문득 고향이 아득하다.

아직 정초라 그런가. 고향이 떠오르고, 이제는 계시지 않는 부모님이 떠오른다.

 

 

나는 매봉에서 내려와 원터골 방향으로 하산했다.

봄 느낌 때문인지 나처럼 산을 찾는 이들이 제법 많다. 오래전, 이 산 아래 주말농장에서 나는 고추를 심고 옥수수를 심었다. 가을이면 인근 배나무 과수원 주인과 이 산을 함께 오르곤 했었다. 그때를 생각하며 별생각 없이 산길을 내려왔는데, 얼마쯤에 보니 길이 낯설다.

길을 잘못 든 모양이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농가가 나오고, 등산로가 아닌 농가의 안마당을 들어서게 되었다. 나는 미안한 마음에 허리를 숙여 마당을 가로질러 가다가 우연히 그 집 처마 기둥에 걸린 빛바랜 사진 액자를 보았다. 잠깐, 거기에 눈을 둘 때다.

 

 

“힘드실 텐데 좀 앉았다 가슈.”

뒤뜰에서 노인 한 분이 돌아 나왔다.

“사진 좀 구경해도 될까요?”

내 말에 노인이 그러슈, 하며 햇볕 좋은 마루에 걸터앉았다.

사진은 어디서나 보던 그 사진들이었다. 사모관대를 한 신랑과 연지 곤지를 찍은 신부의 결혼식 사진에서부터 아기 돌사진, 노인의 회갑연, 군에 입대한 해군 복장의 젊은 아들….

 

 

“보고 싶을 때 보기 쉬우라고 내다 걸어놓았지요.” 노인이 그랬다.

나는 한참 동안 액자 속의 사진을 올려다 보다가 그냥 나오기 뭣해 노인 곁에 잠시 앉았다.

“참 다복한 가정을 이루고 사셨네요.”
나는 인사 삼아 말했고, 노인은 그렇긴 하죠, 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집 안마당을 걸어나올 때쯤 고향을 지키시던 아버지가 떠올랐다.

 

 

누구나 나이를 먹으면 큰 세상을 두고 돌아와 고향 집을 지키며 산다. 뿔뿔이 흩어져 사는 가족들의 과거 사진을 보며, 그 과거 속으로 들어갔다가, 또 나왔다가 하며 하루하루를 산다. 가족들 중 누군가의 전화가 오면 전화를 받으며 지금 이 현재를 살고, 전화가 끊기면 그의 사진을 바라보며 다시 그들의 과거로 들어간다.

 

 

빛바랜 가족사진을 보는 일은 먼 과거를 드나드는 시간 여행과 같다. 가족사진 속엔 그런 시간의 경계를 허무는 마법이 있다. 과거니 현재니 하는 시간의 질서가 거기엔 없다. 원하기만 한다면 자신을 과거로 데려가거나 현재로 데리고 나온다.

청계산 기슭에서 만난 노인은 어쩌면 그런 마법을 즐기기 위해 사진 액자를 방안에서 바깥으로 이끌어 냈을지 모른다. 사람이 나이 먹어 최후로 기댈 곳은 가족이다. 오늘 우연히 매봉에 오른 까닭을 생각한다.

 

교차로신문 2024년 2월 1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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