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좀 기다리면 먹을 수 있단다

권영상 2024. 1. 10. 11:21

 

좀 기다리면 먹을 수 있단다

권영상

 

 

 

내 고충을 들은 딸아이가 컴퓨터를 구입해 놓았단다. 새로 컴퓨터를 사면 여러 파일을 옮기는 작업이 번거롭다. 딸아이가 제 직장으로 돌아가기 전에 바꾸긴 바꾸어야 했다.

지금 쓰는 컴퓨터는 산 지 12년이나 됐다. 적지 않은 시간이다. 그 사이 나는 직장에서 벗어났고, 안성에 텃밭을 구해 텃밭 농사를 짓고 있다. 그러면서 퇴직 후의 일상에 그런대로 적응하고 있는 중이다.

 

 

내 컴퓨터 작업이야 뻔하다.

주로 ‘한글’ 작업이다. 그외 방문자수가 14만 명쯤 되는 블로그가 있고, 거기에 필요한 사진 자료, 여기저기 정보를 찾는 일. 뭐 대충 그런 일 정도이다. 암만 그래도 활용을 잘 하는 이들의 양만큼은 따라가지 못한다.

그 정도인데도 컴퓨터는 힘겨운 모양이다. 전원을 넣고 부팅을 기다리는데 시간이 많이 걸린다. 그 시간을 기다리는 일이 제일 힘들다.

가끔씩 내 컴퓨터를 열어보는 아내나 딸아이 모두 구물거리는 컴퓨터 속도에 한숨을 내쉰다. 아니 이렇게 느린 걸 가지고 어떻게 작업했느냐며 타박이다.

 

 

다른 건 몰라도 그것만은 나도 인정한다.

커피 한 잔을 다 마시도록 부팅이 안 된다.

아니, 왜 이렇게 나를 힘들 게 하는 거야! 성미 급한 놈 이러다 숨넘어가겠다!

나는 느린 컴퓨터를 보고 성화를 대거나 졸라댄다.

그러던 어느 날이다. 문득 어머니를 졸라대던 어린 시절의 내가 떠올랐다.

 

 

어머니는 가끔 별식을 해 주시곤 했다.

별식이라면 맛있는 빵이다. 두툼한 찐빵. 그 시절, 찐빵만큼 먹고 싶고, 기다려지는 별식이 또 어디 있을까. 그러나 찐빵 역시 기다림 없이 그리 쉽게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밀가루에 이스트를 넣고 반죽을 한 뒤 안방 따뜻한 아랫목에 이불을 덮어 발효를 시키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엄마, 언제면 먹을 수 있어요?”

그러면 어머니는 팥을 삶는 부엌불을 내다보며 대답하셨다.

“좀 기다리면 먹을 수 있단다.”

 

 

어머니는 솥에서 팥이 무르게 익고, 밀 반죽이 알맞게 뜨고, 떼어낸 반죽에 팥 앙금 한 숟갈 넣고 오므리고, 솥안에 밥보자기 깔고, 빵을 쪄낼 시간을 계산하면서 대답하셨을 테다.

그러나 성급한 나는 “엄마, 좀이면 그게 언젠데?” 하고 재차 묻는다. 그러면 어머니는 “우리 막둥이 먹고 싶어 눈물 날라 날라 할 때.” 하시며 나를 다독이셨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부팅이 느린 컴퓨터가 어머니를 조금 닮았다. 왜인지 느린 컴퓨터에서 까닭 모를 어머니의 모습이 느껴진다.

학교에서 돌아와 밥을 재촉하면 어머니는 먼저 ‘배고프겠구나! 조금만 기다리려라,’ 하셨다. 어머니는 밥만이 아니라 그 사이 계란탕도 만드셔야 했고, 김도 한 장 구우셔야 했다.

 

 

이 오래 된 컴퓨터 역시 부팅하려면 제 딴엔 이것저것 다 갖추어야 하려니 구동 시간이 좀 걸리겠다.

“아직도 더 기다려야해?”

나는 예전의 어머니에게 조르듯 커피잔에 입을 대며 또 한번 재촉해 본다.

“우리 막둥이 울라 울라 했지? 이제 찐빵 다 됐다!”

그러시는 어머니 목소리처럼 드디어 컴퓨터가 부팅 됐다. 한번 부팅 되면 페이지는 술술 잘 넘어간다. 처음이 좀 힘들 뿐이다.

 

<교차로신문> 2024년 1월 1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