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지붕집의 한바탕 풍경
권영상
아니나 다를까, 안성집에 내려와 보니 길 건너 빨간지붕집 마당에 커다란 크리스마스트리가 서 있다. 그 집 부부의 열렬한 성향으로 보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내일 모레가 크리스마스, 내일이 이브다.
시간이 오후 쪽으로 기울수록 그 집 마당이 부산해진다. 주말을 피해 크리스마스를 앞당겨 즐기려는 모양이다. 차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한다.
아내의 여자 형제가 여섯이라던 그 집 남자의 말이 떠오른다.
웬걸! 저녁을 먹고 난 뒤에 보니 울담을 빙 돌아가며 달아놓은 등에 불이 환하게 켜졌다. 마당 한가운데에 세워진 트리엔 색색의 불이 반짝였다. 이윽고 그 집 성능 좋은 스피커에서 목청 좋은 ‘안동역’이 흘러나왔다. 추운 겨울밤을 녹일 듯 요 작은 마을이 들썩인다.
내가 사는 이곳은 집이라곤 여섯 집이 모여 사는 조그마한 시골이다. 빨간지붕집이 작년에 이사 온 이후로 조용하던 마을이 제법 북적거린다. 어떻게 보면 고적한 것보다 나을 수도 있겠다. 헤드라이트를 번쩍이며 두 대의 승용차가 더 들어온다.
빨간지붕집이 붐비기는 지난 번 김장때도 그랬다.
그때 우리는 그저 우리 식구나 먹을 요량으로 무김장을 하러 안성에 내려왔다. 조금씩 심어놓은 무와 대파를 뽑아 깨끗이 씻었다. 나는 아내가 시키는 대로 무를 자르고 도막내고 썰고, 아내는 아내대로 양념을 만들어 버무리느라 거의 하루해를 다 썼다.
그날 오후 4시쯤 무김장을 마치고 잠깐 마당에 나가보니 빨간지붕집 마당에 들어온 작은 트럭에서 사람들이 배추를 내리고 있었다. 꽉 찬 한 대 분량이었다. 형제들이 많다고 하니 어쩌면 저 만큼의 김장이 필요할 것도 같았다. 형제들만이 아니라 형제들의 출가한 아들딸 것까지 하려면 한 트럭분의 배추라도 많은 양이 아닐 것 같았다.
저녁 무렵, 늘 보아오던 그 다섯 대의 승용차가 다 들어왔다.
우리는 세 식구 먹을 양의 김장을 하고도 김장했다고 끙끙 앓았다. 근데 아침에 문을 연 우리는 그 집 마당 풍경을 보고 깜짝 놀랐다. 배추 버무릴 허리 높이의 커다란 탁자들이 길게 놓였고, 김장하려고 숨죽여 놓은 배추가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아침 식사가 끝난 뒤였다. 참았던 그 집 야외 스피커에서 ‘별빛이 흐르는 다리를 건너’라는 노래가 한바탕 울려나왔다. 그 노래는 다시 ‘당신이 부르면 달려갈 거야’로 이어졌다.
나는 그때 이쪽에서 모과나무를 옮겨 심느라 낑낑대고 있었다. 그때 텃밭에서 방풍 속잎을 따던 아내가 내게로 왔다.
“저 사람들 좀 봐. 춤추고 있어.”
그들을 돌아다보면 그들이 민망해 할까봐 나는 하던 일을 계속했다. "배추를 들고 노래에 맞춰 춤추고 있어. 남자들도." 아내가 신기하다는 듯 실황을 중계했다.
노래가 쉬지 않고 마을을 들썩이더니 ‘강화 도령’에서 ‘노란 셔츠 입은 사나이’로, 거기서 다시 ‘봄날은 간다’로 이어지는 걸 보며 우리는 문을 닫고 점심을 먹었다.
근데 그 많은 김장을 요기 근방의 한 시설에 보낸다는 건 그 집과 가까이 지내는 구미아저씨를 통해 알았다. 그럼 그렇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뭘 하든 했다하면 그들은 한바탕 하는가 싶이 하고, 깔끔하게 헤어진다.
크리스마스를 앞둔 오늘밤, 빨간지붕집은 또 불야성을 해놓고 한바탕 들썩거리겠다. 2년 전만해도 그 집엔 할머니가 혼자 고적하게 사셨는데, 어찌 보면 고적함보다는 좀 낫지 싶다.
<교차로 신문> 2022년 12월 2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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