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전자에 물을 끓이며
권영상
날씨가 추워지면서 주전자에 물을 끓인다.
뭐 이것저것, 도라지도 한 조각 넣고, 영지버섯도 넣고, 결명자며, 산수유, 대추도 조금 조금 넣고 끓인다. 뭘 알고 넣는 게 아니라 그저 좋을 거라는 생각으로 넣는다. 주전자의 물을 끓이노라면 집안이 훈훈해진다. 뽀얗게 오르는 김, 보글보글 끓는 물소리, 주전자 뚜껑 여닫히는 소리, 그런 것들이 스산한 겨울철 집안 분위기를 부드럽게 바꾼다. 주전자는 제 입을 빌어 한 번도 말한 적이 없지만 분명히 이타적이다.
한 주전자 잘 끓인 물을 머그컵에 쭈르르 따른다. 두 손을 컵에 대고 뜨거운 물이 만들어내는 그 따끈한 열기를 먼저 즐긴다. 손을 댔다가 앗 뜨거! 하며 또 얼른 뗐다가 다시 댄다. 뜨거운 걸 알면서도 뜨거운 물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후후후 물을 불어 홀짝거리는 물맛이라니! 따끈해서 좋다. 몸이 훈훈해져 좋다. 이윽고 몸이 편안해진다. 무엇보다 잔뜩 긴장해 있던 마음이 녹느라 누글누글해져 좋다.
겨울엔 큼직한 주전자로 끓여낸 물이 있으면 며칠은 목마를 걱정이 없다. 밥 먹고 사이사이 속이 허전할 때 이것저것 군것질하는 대신 잘 끓인 물 한 컵을 마시면 시들었던 몸이 파득파득 펴지는 걸 느낀다.
몸이 늘 피곤해 아는 동네 병원을 찾은 적이 있다. 나를 잘 진찰해본 의사가 말했다.
“물을 많이 드세요. 몸에 수분이 적어서 오는 피로감입니다.”
그분은 약 처방도 않고 나를 돌려보냈다. 그 후 나는 내가 알아서 대추며 도라지 등속을 조금씩 넣어 끓여 마신다. 그건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출근하면 물 2리터를 주전자에 받아 하루 종일 다 마시고 퇴근했다.
주전자는 그렇게 목마른 사람의 목을 축여준다.
탁주라거나 소주 한 병을 주전자에 부어보면 금방 안다. 주전자가 얼마나 마음 씀씀이가 넓은지, 고단한 인생 때문에 목 말라하는 이들의 몸과 마음을 얼마나 촉촉이 적셔주는지.
“자, 한잔 받게나.”
빈 잔을 내미는 뒷배에 마음을 기울여주는 주전자가 있다.
주전자는 스스로 배가 불러 언제나 가진 것이 많다. 기울이면 기울이는 대로 제가 가진 것을 아낌없이 부어준다. 그가 죽마고우든, 아니면 처음 만나는 친구든, 아니 지금은 척을 지고 사는 이웃이든, 그와 마주 앉으면 나보다 먼저 마음을 써주는 것이 주전자다. 주전자는 상대를 향한 나의 닫힌 마음과 상관없이 술 한 잔 가득 채워준다.
주전자에겐 그런, 오랜 약속처럼 인심과 우정과 사랑과 관심을 채워주는 좋은 버릇이 있다. 그렇게 서로 한 잔씩 주거니 받거니 하면 이내 몸은 훈훈해지고, 벽은 허물어지고, 굳었던 마음이 이윽고 물렁물렁해진다.
내가 잘 아는 술 좋아하는 친구는 맨싸둥이 술병으로 술을 마시지 않는다. 예의가 아니라는 거다. 그는 식당이건 포장마차건 술을 마실 때면 꼭 주인에게 주전자를 청한다. 술병에 술이 줄어드는 걸 빤히 보면서 마시면 술이 풍기는 넉넉한 정이 사라진다는 거다.
‘그런 의미에서 술은 주전자가 적격이지.’
그의 말대로 주전자는 오랫동안 우정과 회한과 목마른 인생을 적셔주는 일에 한몫 해왔다. 늦었지만 나도 누군가의 빈 잔에 마음을 기울여주는 주전자가 되고 싶다.
날이 저물기 전에 가스 불에 주전자를 얹고 물을 끓인다.
<교차로 신문> 2022년 12월 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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