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살아 돌아온 광부들

권영상 2022. 11. 10. 19:55

 

살아 돌아온 광부들

권영상

 

 

봉화 아연 채굴광산 매몰사건 후, 221시간 만에 광부들이 살아 돌아왔다. 190미터 지하 갱도에서 무려 9일 20시간을 견뎌낸 그분들의 극적 생환이야말로 다름 아닌 기적이다. 답답한 우리 현실을 밝히는 한 줄기 생명의 빛이다.

 

 

내가 처음 직장 생활을 한 곳은 강원도 정선군의 탄광을 근거지로 하는 초등학교였다. 우리나라 채탄량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거대 광업소 덕분에 세상과 두절된 산간 속 소규모 초등학교는 60학급이 넘는 초대형 학교로 컸다. 교실이 모자라 오전 오후반 운영을 했고, 한 반 학생이 60여 명쯤 되었으니 전교생만도 무려 3000명이 넘었다. 학교 규모가 이 정도면 광업소에서 일하는 광부들만도 1000 여명이 넘는다는 이야기다.

 

 

광업소 확성기에서는 아침마다 노래가 쏟아져 나왔다. 확성기는 광업소 쪽에도 있지만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는 삼거리 옆 야산 종탑에도 설치되어 있었다. 노래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일요일을 제외하고 흘러나왔다.

‘휘날리는 태극기는 우리들의 표상이다. 힘차게 약진하는…….’

대체로 힘차고, 건전하고, 약동하는, 이를테면 심장을 뛰게 하는 노래들이었다.

노랫소리가 울려 퍼지는 이 때는 해가 산 위로 떠오르는 아침 시간이었고, 3교대 광부들의 출근시간이었다. 동시에 이 마을 직장인들의 출근 시간이었으며, 마을 가게들이 문을 여는 시간이었다. 좀 이르긴 해도 이 시간은 산간 마을 모든 학생들의 등교 시간이었다.

 

 

우리는 매일 ‘힘차게 약진하는’ 노래를 들으며 학교로 출근했다. 그때에 맞추어 광업소행 통근버스가 먼지를 풍기며 달리기 시작했고, 밤새워 달려온 청량리발 기차가 요란한 기적을 울리며 지나갔다.

그 노래를 들으면 발걸음이 가벼워졌고, 잡념이 사라졌고, 아니 잡념에 비집고 들 틈이 없었다. 방금 집안에서 치루고 나온 언쟁의 뒤끝도 날아갔다. 오직 한 곳을 향해 걸어가게 하는 힘이 그 노래에 있었다. 사람뿐 아니라 지나가는 강아지도 그 노래를 들으면 겅실거리며 뛰었다.

그 많은 학생들이 어쩌면 이렇다 할 사고 없이 오전 오후반으로 잘 운영된 것도 지금 생각하면 그 ‘힘차게 약진하는’ 노래 덕분이었을 것 같다.

 

 

어떻든 우리들의 아침은 그렇게 좀 빠른 템포로 매일 시작되었다.

그러나 가끔 그 ‘힘차게 약진하는’ 노래가 광업소 확성기에서 나오지 않을 때가 있었다. 이런 날은 모두들 침묵했다. 광업소를 터전으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중 그 누구도 그 일에 대해 묻는 사람이 없었고, 그 누구도 그것이 무얼 말하는지 모르는 이도 없었다. 그런 날은 아무리 초등학교 1학년이어도 길에서 싱겁게 웃거나 철없는 농담을 하지 않았다.

그런 날은 하루 종일 시간이 무겁게 흘렀다. 출근하면 맨 먼저 교실로 달려가 혹시나 하는 두려운 마음으로 아이들이 앉은 의자의 빈자리를 찾았다. 확성기에서 노래가 나오지 않을 경우라면 그건 인명사고다.

 

 

어느 분인가 사고를 당했다면 그 가족은 대개 1주일 안에 소리없이 이곳을 떴다. 딱히 탄을 캐는 일 이외의, 남은 가족이 할 수 있는 일은 외로운 이 산간지역에 없었다.

광업소 확성기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는 늘 듣는 사람을 약동하게 했다. 그러나 어찌 보면 그건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살얼음판 같은 삶을 애써 위로하거나 진정시키는 노래였다.

“제발 우리 반 모두 무사하기를!”

확성기가 침묵하는 아침이면 그런 기도를 하며 출근했다. 그 외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교차로신문> 2022년 11월 1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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