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날밤 첫날밤 권영상 이번도 일 주일만에 안성에 내려왔습니다. 모임도 모임이지만 서울에 가족이 있으니까요. 가족, 이라 하니까 그렇습니다. 자식을 낳아 30여 년을 살았다 해도 정작 나는 가족보다는 가족 바깥의 일에 정신을 팔고 살았습니다. 직장은 어쩔 수 없었다 하더라도 밥벌이도 안 .. 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2014.06.27
오래된 만년필을 쓰다 오래된 만년필을 쓰다 권영상 책상 서랍을 정리하다가 만년필을 발견했다. 늘 여닫는 게 책상 서랍인데 오늘에야 만년필이 내 눈에 띄었다. 수첩과 주소록 밑에 숨죽이듯 누워있다. 모두 여섯 개다. 국내 제품도 있고, 누구나 한두 개씩은 가지고 있음직한 잘 알려진 몽블랑과 파커 만년필.. 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2014.06.17
유월의 밤골 풍경 유월의 밤골 풍경 권영상 모내기가 궁금해 논벌에 나갔다. 봄이 오면서부터 나도 바빠져 벽장골 논벌에 나가기는 오늘이 처음이다. 모를 심은 뒤라 논벌이 파랗다. 모살이도 다 된 듯 싶다. 작년 겨울에 눈을 맞던 논벌이 파랗게 살아난다. 이제 이 논벌의 주인은 모다. 이게 자라서 꽃을 .. 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2014.06.11
5층 할아버지 5층 할아버지 권영상 가끔 뵙는 할아버지가 있다. 크림색 양복에 중절모를 쓰고 단장을 짚고 조용히 걸으시는 분. 아파트 우리 집 위층인 5층에 사시는 분이다. 일흔 후반은 되셨을까.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드리면 네에, 그렇게만 대답을 하시는 분. 내가 그분에 대해 아는 건 이게 전부.. 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2014.06.08
아내의 구두를 닦으며 아내의 구두를 닦으며 권영상 다들 출근하고 나만 남았다. 11시 모임에 대기 위해 나는 좀 여유있게 준비를 하고 신발장을 열었다. 내 구두가 뿌우옇다. 구둣솔을 집어 들었다. 대충 솔질을 하고 신발장을 닫는데 신발 하나가 떨어졌다. 아내 구두다. 나도 모르게 발길로 툭 찼다. 직장 일.. 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2014.06.07
단오 열전 단오 열전 권영상 “남자는 태어나 몇 번 울어야 하는 지 아는 사람 손 들어보시오!” 사내의 말에 이 사람 저 사람 소리쳤다. “세 번! 세 번이오.” “그럼 언제 언제 울어야 하는지 누가 맞혀 보시오. 맞히면 하나밖에 안 남은 내 몸뗑이를 바치겠오. 간을 달라면 간을 주고, 거시기를 달.. 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2014.06.04
난장판 같은 하루 난장판 같은 하루 권영상 아침에 쌀을 안칠 때 목이버섯 넣는 걸 잊었다. 밥에다 목이버섯 넣으면 밥맛이 좋아진다는 말을 들었다. 그 말 듣고 서울서 내려올 때 일부러 마트에서 목이버섯을 사왔다. 그래 놓고는 아침을 할 때 그걸 잊었다. 어제는 냉동실 쑥을 꺼내 쑥버무리 밥을 했다. .. 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2014.06.04
무념의 종교, 나무 무념의 종교, 나무 권영상 텃밭 토마토 곁가지를 따고, 김을 매주고 방에 들어왔습니다. 덥습니다. 물 한 컵을 들이켜고 숨을 돌리는데, 창가에 심어놓은 으름덩굴이 흔들거립니다. 그 사이 바람이 부는가 봅니다. 열어놓은 현관문이 두둑두둑 벽에 부딪히는 소리가 납니다. 커튼이 가벼이.. 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2014.05.30
난나가 떠났다 난나가 떠났다 권영상 나흘간 머물던 안성에서 올라왔다. 빈 반찬통이며 흙투성이 옷가지가 든 짐이며, 텃밭에서 크는 상추잎 따넣은 가방을 차에서 내려들고 계단을 올랐다. 다들 직장에 가고 없을 오후 4시쯤. 있다면 빈 집을 지키고 있을 난나뿐이다. “난나, 나 왔다!” 문을 열고 들.. 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2014.05.23
들풀의 속임수 들풀의 속임수 권영상 꼭 일 주일 만에 안성에 내려왔습니다. ‘시와 여울’이라는 글쓰는 동인 모임이 있었고, 뉴저지에 사는 처남이 온댔으니 안 보고 내려올 수 없어 일 주일을 채우고야 내려왔네요. 서울로 올라갈 때는 밭에 심은 강낭콩이 하나둘 올라오기 시작했습니다. 상추와 쑥.. 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2014.05.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