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오 열전
권영상
“남자는 태어나 몇 번 울어야 하는 지 아는 사람 손 들어보시오!”
사내의 말에 이 사람 저 사람 소리쳤다.
“세 번! 세 번이오.”
“그럼 언제 언제 울어야 하는지 누가 맞혀 보시오. 맞히면 하나밖에 안 남은 내 몸뗑이를 바치겠오. 간을 달라면 간을 주고, 거시기를 달라면 거시기를 베어주겠오.”
사내는 군데군데 찢어진, 배 나온 광목천 웃옷을 훌렁 벗어보였다.
살이 잘 찐 투실투실하고 불콰한 몸이다.
“태어나서 한 번!”
앞자리에 앉은 아줌마가 불콰한 몸이 탐나는지 대뜸 대답했다.
“또?”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옳지. 마지막으로 또?”
“마누라가 죽었을 때.”
아주머니의 대답이 끝나자, 사내가 되받아쳤다.
“미친 소리 하네. 마누라 죽음 웃지, 우는 정신 나간 새끼가 이 시상에 어디 있어!”
그러자 모여 선 사람들이 와아! 웃었다.
사내가 제 입으로 대답을 말했다
“첫째와 둘째는 딱 맞는디 싯째는 틀렸어.”
그러면서 자신의 고무줄을 넣은 광목 중의의 허리춤을 잡아당겨 그 안의 것을 들여다보며 걸쭉한 입담을 내놓았다.
“시번째는 밤중에 마누라가 한번 하고 싶으나 사내의 이 빤스 안에 있는 이놈의 못난 것이 서주지 않을 때 마누라는 기가 막히지.”
그러며 사내가 목 놓아 소리를 했다.
“어이쿠, 내 가련한 인생아. 이제 무슨 재미로 살꼬나. 남편은 못 생겨 정 떨어진지 오래나 이것만큼은 못 생길수록 살 깊은 맛이 좋아 정붙이며 살았는디, 이제 이것의 숨이 넘어갔으니 어이 살꼬. 이 가련하고도 가련한 인생이여! 하고 마누라가 울 때, 그때 남자는 시번째로 속으로 운다 이거지.”
이러며 사내가 제 광목 중의를 당겨 그 안을 들여다보며 우는 시늉을 한다.
모여 섰던 사람들이 일시에 또 한 바탕 웃었다. 아줌마도 아저씨도, 할머니도 할아버지도 남자도 여자도 거기 서 있던 나도.
“판사 검사 변호사 의사. 이 말고 ‘사’자 든 거룩한 사람이 또 하나 있는디 그가 누구냐? 여기 있는 이 약장사.”
약장사의 질벅한 입심에 사람들이 키들키들 웃었다.
이름하여 ‘허리수와 장금이 품바’.
강릉의 단오 터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제일 먼저 만난 건 품바였다.
지난 일요일 아침, 안성에서 서울로 와 집에다 빨랫거리랑 가방을 내려놓고 바로 강릉으로 내려갔다.
강릉이 고향인 사람들이라면 다들 ‘단오’라는 말을 들으면 설렌다. 밥 먹던 숟가락을 내던지고, 마누라 치마끈을 풀던 손을 놓고, 손아귀에 잡은 모춤을 내던지고 남대천 단오터로 향한다. 음력으로 5월 5일이면 강릉사람들의 머릿속엔 연어처럼 단오터로 향하는 모천회귀의 나침반이 작동한다.
품바의 약장수 공연장에서 나와 남대천 변에 줄지어선 오만가지 물건을 파는 부스를 지나 다다른 곳엔 모 방송사배 농악경연대회가 한창이었다. 금속성 꽹과리와 징소리가 단오터를 달구고 있었다. 내 걸음이 그쪽으로 향해 빨라지고 있었다.
이미 내가 공연장에 들어설 땐 포남동 농악 팀이 한창 불을 뿜고 있었다. 소고를 든 소고패들과 치마저고리를 입은 무동들의 모 찌기, 모심기 연기가 한창이었다. 늙수그레한 남정네들이 상두를 돌리며 소고 치는 모습을 보면 몸이 막 떨린다. 그들의 늙은 얼굴에서 흥에 젖던 아버지를 보기 때문이다. 나는 이유도 없이 흘러내리는 눈물범벅으로 때로는 울고 웃으며 관전했다. 난타하는 꽹과리며 징소리는 고향을 떠나 사느라 겪었을 설움과 외로움을 한꺼번에 풀어낸다. 포남동 농악이 끝나고 강남동 농악이, 강남동 농악이 끝나고는 여자 상쇠를 둔 성덕동 농악이 무대를 달구었다.
단오 본디의 뜻인 제천의 이 뜨거운 춤과 놀이와 연주의 열기는 하늘을 감동시키고도 충분히 남을만 했다.
나는 농악터에서 무려 3시간이나 머물다가 성덕동 농악을 끝으로 나와 점심을 먹었다. 당연히 어린 시절 아버지를 따라와 먹던 국밥집을 찾았다. 맛은 그 시절의 그 은은한 국밥맛이 아니었으나 국밥 한 그릇 앞에 놓고 앉았을 때의 기분만큼은 그때와 다르지 않았다.
국밥 한 그릇을 먹고, 그네 터를 지나 내 발길이 가 닿은 곳은 굿당. 자리 한 군데를 잡고 앉아 젊은 무녀의 사설에 귀를 기울였다.
“시집 온지 석 달 만에 정도 못 들인 남편은 전장에 나갔지. 삼월이라 삼짇날 강남 갔던 제비는 돌아들 오는데 낭군은 오지 않고 온다는 것이 전사 소식이었네. 설마 설마 그 소식 믿지 않으려 온다 온다 내 낭군 살아온다 내 마음 다독일 제, 오는 것은 낭군이 아니요 봄밤의 외로움뿐이로다. 7월이라 칠석날 견우직녀는 만나는데 이 내 몸은 만날 임 없어 비 내리는 하룻날을 울며 울며 보내노니, 하늘에 계신 옥황상제 땅에 계신 지하장군님 내 낭군을 보내주소…….”
일찍 남자를 잃고 설운 세상을 사는 여인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무녀의 애절하고 슬픈 사설에 나도 울먹해졌다. 내 인생이 그러해서가 아니라 그런 인생을 살고 가신 당숙모님의 서러움 많던 생전의 일이 떠올라 그러했다.
축원 굿은 사설을 알고 들어도 좋고, 모르고 무녀의 목청의 분위기에 젖어 들어도 좋다. 그걸 다 듣고 나면 마음에 맺힌 서러움이 말끔히 씻겨나는 듯해 좋다. 옛날의 서러움 많던 여인들은 이런 방식으로 마음의 치유를 받았다. 지금으로 말하면 힐링이다. 박수들의 징소리는 억장을 무너뜨리는 듯 하다가도 무너진 가슴을 다시 일으켜 세워 준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돌려 굿당을 나왔다. 갈 곳이 또 있다. 동춘 서커스다. 어린 시절 우리를 유혹했던 서커스. 그때의 서커스 공연 천막 앞에는 원숭이가 어린 우리를 유혹했다. 때론 코끼리도 서커스단과 함께 마을로 찾아왔었다.
입장료 만 원을 내고 들어갔다. 생각보다 관객들이 많다. 대부분 나이 많은 분들이다. 나도 한 자리 차지하고 앉았다. 그 옛날의 줄을 타는 애잔한 소녀도 없고 피에로도 없다. 젊은 청년들이 대부분인 일종의 묘기 스포츠, 스포츠 묘기, 그런 수준이다. 그러니까 과학과 스포츠라는 방식으로 서커스가 진화하고 있음이 한 눈에 보였다.
서커스 관람을 끝내고 나왔을 때가 오후 5시 40분.
조카한테서 전화가 왔다.
나는 굳이 이 서커스단 앞에서 그를 만나 서커스단의 트럼펫 소리를 들으며 저녁술을 들고 싶었다. 남대천의 밤바람을 쐬며 마시는 술은 약술이다. 고향을 잊고 사느라 외로웠던 몸을 편안하고 푸근하게 달래어 주는 술이다.
이튿날, 강릉을 떠나 대관령을 거쳐 서울로 돌아오면서도 줄곧 떠나지 않는 생각이 있었다. 왜 이 단오라는 오래된 문화에 애착을 갖는가, 그 점이었다. 현대문명이라는 것은 새롭지만 동시에 낯선데서 오는 불안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오래된 문화는 눈물을 잘 흡수하는 낡은 손수건처럼 안식과 치유의 힘이 그 무엇보다 높다. 어쩌면 그 이유 때문에 오래된 농경문화에 집착하는지 모르겠다.
이 힘으로 나는 또 추석이 오기까지 낯선 객지의 삶을 잘 견뎌낼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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