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난장판 같은 하루

권영상 2014. 6. 4. 13:59

난장판 같은 하루

권영상

 

 

 

 

 

아침에 쌀을 안칠 때 목이버섯 넣는 걸 잊었다. 밥에다 목이버섯 넣으면 밥맛이 좋아진다는 말을 들었다. 그 말 듣고 서울서 내려올 때 일부러 마트에서 목이버섯을 사왔다. 그래 놓고는 아침을 할 때 그걸 잊었다. 어제는 냉동실 쑥을 꺼내 쑥버무리 밥을 했다. 내일은 밥에 감자를 안치기로 했다. 이러다 목이버섯밥 못 먹어보고 그냥 올라가겠다.

들깨 모종을 하는 걸 잊고 어제는 물오이와 토마토, 애호박에 물을 주고 잤다. 밤에 자다가 생각하니 그제야 들깨모종 놓친 게 떠올랐다. 아내가 밤늦도록 해놓은 오이김치를 가져오지 않아 정신을 어디다 놓고 사느냐는 잔소리를 들었다.

 

 

 

이번 일정은 하여튼 좀 그렇다. 순서가 없고 중구난방 뒤죽박죽이다.

11시쯤 마당에 나가 파밭에 물을 주고 들어오는 데 덥다. 찬물로 샤워를 하고 의자에 앉으려니 몸이 나른했다. 거실 차가운 바닥에 오히려 마음이 갔다. 거실을 다시 한 번 말끔히 닦고는 여름 이불을 꺼내다 폈다. 새 이불 위에 누웠다. 좋다. 허리를 쭉 폈다. 시원하다.

누운 채 바깥을 보려니 건너편 할머니네 담장 밑에 노란 꽃무덕이 눈에 들어온다. 낮에 피는 황금달맞이꽃이다. 모로 누워 그걸 보다가 안 자던 낮잠을 한숨 자고 말았다. 필름식 거실 커튼이 덜걱덜걱 벽에 부딪는 소리에 깼다. 댓바람에 일어나는 게 싫어 누운 채 리모컨을 들고 텔레비전을 켰다. 레알마드리드와 AT마드리드의 유럽축구 결승전이다. 오랜만에 보는 유럽 축구다. 그들의 빠르고 정확한 패스, 기동성 있는 공격과 수비, 무엇보다 빠른 속도로 끊임없이 생각하는 그들의 축구가 좋다. 십여 분 보고 있으면 내 머리가 긴장하고 새파랗게 생기가 돈다. 그러면서 화가 난다. 나는 왜 저런, 팔팔하게 생각하는 글을 쓰지 못할까 하는.

 

 

 

30여분 보다가 껐다. 결승전을 보느라 정신이 맑아졌다. 식탁에서 보던 책을 끄집어 내렸다. 문학사상에서 나온 이해인 수녀님의 시전집이다. 시원한 방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려 읽다가 접어두었던 페이지를 열었다.

몇 장을 넘기는데 시의 행간을 어지럽히는 녀석들이 나타났다. 건너편 숲에서 꾀꼬리가 꼴깍꼴깍 운다. 텔레비나 보지, 시는 무슨 시, 하고도 울고, 빈둥빈둥 놀기나 하지, 책은 무슨 책, 하고도 운다. 꾀꼬리의 유혹은 집요했다. 목소리를 바꾸어가며 요염하게 울다가 또 비명을 지르듯 울다가, 청랑하게 울다가, 정념이 넘치는 음란한 목청으로 운다. 한 마리가 아니라 꼭 마주보는 두 놈이 입을 맞추어 가며 호사스럽게 우는데, 그 유혹에 내가 자꾸 넘어가려 한다.

 

 

 

 

마트에서 사온 비스킷이 생각났다.

뭔가 몸이 음란해지려 할 때를 대비해 그걸 막는 법을 개발한 게 있다. 뭘 먹는 거다. 텔레비전에서 긴장되는 국면을 보아도 나는 얼른 일어나 어딘가에 있는 비스킷이나 사탕이나 초콜릿을 찾는다. 에로틱한 장면이 나올 것 같다거나 좀은 섬뜩한 장면이 나올 거라고 예상하기만 해도 나는 벌떡 일어나 식탁 위의 과자를 찾아 먹곤 했다.

나는 비스킷을 먹으며 꾀꼬리 소리를 잊느라 애썼다.

 

 

 

그때다. 강릉 둘째조카한테서 전화가 왔다.

“단오에 한번 내려와야지요.”

그러고 보니 벌써 단오다. 유월 첫째 주 한 주일 동안 단오행사가 있다는 걸 인터넷에서 봤다. 첫날에 내려와 대관령 국사성황당신을 모시는 것부터 봐야하지 않느냐고 성화다. 흥이 많고 술을 좋아하는 조카다.

“가야지. 가서 굿당의 굿도 보고, 남대천변에 앉아 막걸리도 먹고 그래야지.”

이제는 퇴직을 했으니 가서 굿도 실컷 보고, 동 대항 농악패들의 농악 경연도 보고 싶다. 그리고 뭐니 뭐니 해도 일가붙이들과 난전에 둘러앉아 국밥을 먹고, 감자전에 막걸리를 먹고, 좀 얼큰히 취해서 동춘천 서커스를 보고 싶다.

 

 

 

전화를 끊고 나니, 너무 할 일없이 빈둥거리는 것 같아 얼른 가방에 넣어온 평론집을 꺼냈다. 며칠 전 시인 이안씨가 쓰고 보내준 ‘다 함께 돌자, 동시 한바퀴’다. 문체가 살갑고, 동시에 대한 애정이 남달라 읽는 재미가 있다.

시원하던 방바닥이 다시 더워졌다. 돌아누웠다. 그러고 보니 아침 운동을 안 했다. 나는 누워하는 맨손운동을 시작했다. 두 다리를 모아 70도 정도 들어 올렸다 내렸다 하기를 15번. 언제 해도 힘들다. 두 발을 모으고 엉덩이를 들어올려 10초 머무는 운동도 10번 했다. 이걸 하지 않으면 허리가 아프다. 흉측스러운 나의 척추관 협착증.

일어나 앉아 다시 텔레비전을 켰다. 이미 유럽챔피언전 결승전은 끝났다. OCN 채널에 니콜 키드먼이 나오는 디 아워스가 중반전에 가 있다.

 

 

 

 

안성과 서울을 오르내린지 네 달이나 되었다. 한 사나흘씩 머물다 가긴하지만 어느덧 이 집에, 이 동네에, 여기서 만나는 이 시간에 내가 친숙해진 것 같다. 여느 때 같으면 내 몸이 긴장해 있어 텔레비전을 켜지 못 했다. 낮에는 텃밭 일이 있어 못 켰고, 밤에는 소리를 내어 텔레비전을 켜는 일이 무서웠다. 낯선 안성의 밤이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데 요즘 내가 자꾸 텔레비전을 켠다. 좋은 일이 아니다. 그렇지만 이런 날이 오길 내심 기다리기도 했다. 아무 것에도 얽매이지 말고 마음이 가는대로 여유를 누릴 때 이 시간과 공간이 그 무엇으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리라 기대하기 때문이다.

 

 

 

바깥에 나가 상추 몇 잎을 따가지고 다시 거실에 들어서며 나는 소리쳤다.

“아, 뒤죽박죽이구나!”

거실 바닥이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이리저리 밀리는 이불이며, 과자 봉지며, 흩어진 책들이며, 휴대폰이며 리모컨, 벗겨 먹고 난 오렌지 껍질, 아무데고나 벗어던진 양말, 모자…….

어쩌면 나는 지금부터 여유를 즐기고 있는지 모르겠다. 여태 안성은 집에서 싸들고 온 책을 다 읽고 원고를 다 쓰고 가는 숙제하는 일터였다. 그런데 이제 거기서 벗어나는 자유를 이 난장판에서 나는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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