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풀의 속임수
권영상
꼭 일 주일 만에 안성에 내려왔습니다. ‘시와 여울’이라는 글쓰는 동인 모임이 있었고, 뉴저지에 사는 처남이 온댔으니 안 보고 내려올 수 없어 일 주일을 채우고야 내려왔네요.
서울로 올라갈 때는 밭에 심은 강낭콩이 하나둘 올라오기 시작했습니다. 상추와 쑥갓은 모종 몸살에서 막 벗어나고 있었지요. 근데 돌아와 보니 강낭콩은 연둣빛 속잎을 피우고 있었고, 상추 쑥갓은 이랑의 흙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크게 자랐습니다. 감자는 벌써 별꽃 같이 하얀 꽃을 피웠습니다. 마늘밭의 마늘은 마늘쫑다리를 밀어올리고 있었습니다.
늦은 봄, 5월의 한 주일은 세상을 뒤바꾸어 놓을 만큼의 변화를 도모하는 시간입니다. 울타리를 따라 심어놓은 줄장미가 요염하게 피었고, 작약의 꽃몽오리가 팽팽하게 부풀어 올랐습니다.
그런데 나 없는 사이 아주 놀랄만한 변화가 있었네요. 토끼풀입니다. 토끼풀이 마당을 온통 제 세상으로 만들어 놓았네요. 제가 이 집의 주인이 되어있었습니다. 서울로 갈 때까지만 해도 잔디들 사이에 드문드문 나 있었지요. 근데 지금은 세력을 뻗쳐 마당을 제 손아귀에 꽉 잡고 있습니다. 아주 토끼풀 꽃밭이 됐습니다. 옥양목을 빨아 널어놓은 듯 마당이 하얗습니다. 벌들까지 은밀히 불러들였군요. 주인인 내가 와도 아랑곳 하지않고 토끼풀꽃 잔치를 벌입니다. 즐겁기도 하겠지요. 윙윙윙윙, 노래를 부르며 어울려 노느라 마당이 떠들썩합니다.
안성으로 내려올 때 백암에 들려 토끼풀 뽑는 갈고리 호미를 하나 사가지고 왔거든요. 그걸 사들면서 이거면 토끼풀 다 잡겠지, 했는데 때를 놓친 게 분명합니다. 제 집처럼 들어와 사는 토끼풀을 내쫓긴 글렀습니다.
지난 4월, 마당에 나가 토끼풀을 뽑는 나를 보더니 아내가 그 아까운 걸 왜 뽑느냐고 성화를 대었댔습니다. 파란 토끼풀이 잔디보다 더 곱고 예쁘다는 거였지요. 딴은 그 말을 듣고 보니 그렇기도 했습니다. 나도 우리 마당에 잔디만 들여와 살게 하는 풍습을 싫어했습니다. 민들레도 살고, 쏙새도 살고, 쑥이며 냉이도 살기를 바랐습니다. 금을 긋듯 집의 경계를 그어놓고 다른 종들의 접근을 막는 일을 별로 탐탁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지금 와 생각해 보면 그때의 그 휴머니즘이나 아나키즘 같은 생각이 잔디밭을 풀밭으로 만들어버린 겁니다.
봄이 막 시작되는 4월쯤에 보는 민들레꽃은 정말 예쁘지요. 금빛단추같이 샛노란 꽃을 아침 뜰에서 만날 때면 반갑다 못해 혹 마음을 빼앗길 정돕니다. 민들레꽃만인가요? 무리져 피는 작은 냉이꽃이며 별꽃들도 앙증맞아 한번 눈에 익으면 잊을 수 없습니다. 작은 바람에 하늘하늘 흔들리는 그들의 꽃무리를 보면 아, 우주가 여기 있구나! 라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지요.
이른 봄에 태어나는 풀들은 다 예쁩니다. 귀엽고 깜찍하지요. 갓 태어난 아기 염소나 아기토끼치고 안 예쁜 게 없듯 봄 한철 잠깐 왔다가 사라지는 풀들도 한 눈에 쏙 들도록 진화를 했을 테지요. 도시에서 오래도록 살아온 나는 그만 그런 풀의 유혹에 넘어갔던 겁니다. 그래서 이 풀 저 풀 한마당에 다 살게 한 겁니다.
그래도 집 앞 바위억서리에 난 풀은 두 번씩이나 뽑았습니다. 그런데 풀을 뽑을 때도 내 생각이 단호하지 못하여 자꾸 바뀌었습니다. 쑥이나 덩굴 풀들은 뽑으면서 애기똥풀은 남겨두었습니다. 햇빛 잘 받는 곳이라 애기똥풀 포기가 제법 그럴 듯 하게 자라 올랐습니다. 그게 아까워 성큼 뽑는 일을 거두고 말았지요. 자리공 앞에서도 나는 망설였습니다. 이게 토종자리공인지는 모르겠는데 덩치에 맞게 큰 그 널찍한 잎사귀가 양순해 보였습니다. 옛날 고향집 뒤란에서 크던 녀석입니다. 고향집이 생각나 자리공도 남겨두었습니다. 그뿐인가요. 숩북숩북 무리져 오른 망초무리도 차마 뽑을 수 없었지요. 그의 달걀플라이 같은 꽃을 알고 있으니까요. 그러고 보니 좋은 쑥도 한 무덕 남겨두고, 건너편 밭에서 옮겨다 심은 호밀도 두었습니다.
뽑을 것들을 뽑지 않고 두었는데 그것들은 그것들대로 아주 기품있게 커 올랐습니다. 5월의 풀들은 앙증맞기 보다는 기품있는 덩치를 갖습니다. 실하고 굵은 대궁이와 기룸하고 둥글고 넉넉한 잎사귀, 늠름한 체형과 포기가 실한 기품있는 외모.
지금 보기에 그들은 막 18살을 먹은, 소년의 태를 벗은 코 밑이 거무스레한 청년을 닮아 있네요. 한창 늠름하고 멋있을 때입니다. 들풀의 품격이 저 정도일진대 개량한 꽃들보다 못할 게 없고, 천대받을 이유 또한 없겠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어쩌면 들풀의 속임수일지도 모르겠군요. 그들은 초식동물이 차마 입을 대지 못하도록 나름의 위엄을 보이며 진화했을 테지요. 내 눈에 그렇게 보였으니 소나 염소들의 눈에도 그렇게 보였겠지요. 그러면서 빠른 속도로 씨를 퍼뜨려 내년 봄쯤 대지를 점령할 테지요. 그런 줄 알면서도 나는 풀에게 속습니다. 내 마음이 기품있는 풀의 유혹에 넘어간 거지요.
우리 집 마당의 이런 사정을 잘 아는 이가 지난겨울 내게 귀띔해준 말이 있습니다. 새 봄 풀이 돋을 때 ‘파란들’을 치라는 거였지요. 그도 친환경이라는 말을 모르는 이가 아닙니다. 다들 그런다는 거지요. 그러면 풀로부터 완전히 해방될 수 있다고 조용히 일러주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러면 되겠냐고 했지만 나는 지난겨울, 봄이 오면 파란들을 쳐 보리라 했습니다. 근데 막상 봄이 되어 파랗게 돋는 풀을 보자, 차마 그 무서운 일을 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풀이 많으면 많은 대로 그냥 살지 뭐 하고 4월을 넘겼습니다.
그런데 마당을 점령한 토끼풀을 보니 파란들의 유혹이 또 슬쩍 내 머릿속을 스칩니다. 그 일은 어떻든지 내 손에 달렸습니다. 그러니 내 손이라는 게 또 얼마나 무서운 건가요. 이 글을 마당에서 크는 토끼풀이 읽을까봐 일견 두렵네요.
'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무념의 종교, 나무 (0) | 2014.05.30 |
---|---|
난나가 떠났다 (0) | 2014.05.23 |
외딴 집에 내리는 밤비 (0) | 2014.05.13 |
꽃모종 (0) | 2014.05.09 |
제비가 돌아왔다 (0) | 2014.05.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