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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의 샹그릴라

내 마음의 샹그릴라 권영상 그에게서 문자가 왔다. ‘우리에게 언제쯤 마주할 기회가 주어질까. 그때까지 건강에 유의하기 바라네.’ 보내준 노래 잘 들었다며 곡조도 좋지만 가사도 좋다고. 추워지는데 잘 지내라고 보낸 내 문자 메시지에 대한 대답이다. 그는 5년 전 대장암 수술을 받았다. 그 후 탈 없이 조심조심 지냈으니, 어느 정도 안심해도 좋은 때에 와 있다. 그는 고등학교 친구다. 그도 나처럼 남들보다 두어 살 많은 나이에 다녔으니, 어쩌면 그런 사정으로 서로의 마음이 깊이 닿아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도 그때뿐. 졸업과 동시에 나는 그 시절의 일을 까마득히 잊고 살았다. 그 후, 오래 다니던 직장도 물러났다. 그러고도 오랜 시간이 더 흐른 뒤의 어느 날이었다. 그에게서 문득 전화가 왔다. 그때가 ..

그 게임은 길고 힘들었다

그 게임은 길고 힘들었다 권영상 연말 모임 시즌이다. 나는 벌써 몇 번의 연말 모임을 가졌다. 그러고도 몇 번의 모임이 더 남았다. 모임이라 해 봐야 주로 식사 모임이며, 아쉽게 흘러가는 시간에 미력하나마 힘을 보태는 정도이다. 여러 번의 모임 중에서도 모 초등학교 체육관에서 가진 모임은 좀 특별하다. 주최측에서 딱 서른 명만 초대했다. 모여 술을 마시느니 재미난 게임으로 한 해 동안 쌓인 스트레스를 풀자는 취지였다. 간단한 의식이 끝나자, 게임을 지도해 주실 분을 소개했다. 초등학교 선생님이었다. 그분은 서른 개의 의자에 앉은 우리를 그대로 15명씩 홍팀과 청팀으로 나누었다. 그리고 몸에 큰 무리가 가지 않는 초등학생 수준의 게임을 시작했다. 처음 게임은 동그란 색판을 뒤집는 게임이었고, 두 번째는 상..

강인한 것들

강인한 것들 권영상 점심으로 순대국을 먹고 나올 때다. 씨앗가게 앞을 지나던 아내가 길가에 내놓은 씨앗 자루 앞에 앉았다. 종자용 쪽파였다. 한눈에 보기에도 씨알이 푸석푸석해 보였다. “쪽파는 뭣 하러 심으려고!” 나는 아내를 일으켜 세우려고 마음에 없는 소리를 했다. 지난해 아내는, 친구한테 얻은 쪽파 한 봉지를 심어 재미 본 경험이 있다. 아내는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쪽파 자루 안의 쪽파를 이리저리 헤집고 있었다. 나도 손을 넣어 쪽파를 만져봤다. 서서 본 내 판단과 다름없이 쭉정이에 가까웠다. 알맹이가 있다면 끄트머리쯤에 조그마한 마디 하나가 만져질 뿐 속이 비어있었다. 다음에 사지 뭐, 그 말을 하려는데 아내가 주인에게 얼마예요? 하고 물었다. “대신 많이 드릴 게요. 8천원이요.” 했다. ..

느티나무 숲길에 나와 서서

느티나무 숲길에 나와 서서 권영상 뜻밖에 첫눈이 내린다. 좀 전까지만 해도 하늘이 파랗고 해도 좋았는데, 마치 일기예보와 짜고 치듯 눈 내린다. 11월에 내리는 첫눈치고 예사 눈이 아니다. 나는 우산을 쓰고 아파트 후문을 나선다. 느티나무숲 느티나무들이 첫눈에 휩싸이고 있다. 눈은 오후 2시부터 내린다 했고, 적설량은 1센티미터라 했다. 그 말에 나는 ‘1센티나 내린대!’ 하며 코웃음 쳤다. 첫눈이 내리면 얼마나 내린다고 적설량 타령일까 했다. 그러나 휘몰아치는 눈보라에 나는 적잖이 놀란다. 느티나무 숲은 떨어진 느팃잎으로 수북하다. 그 위로 눈이 내린다. 눈 아래 잠들고 있는 낙엽들은 모두 지난봄과 여름과 가을이 만들어놓은 고단한 잔해들이다. 봄이 왔을 때 느티나무들은 숲을 연둣빛으로 환하게 만들었다...

수능 끝나거든 좀 홀가분해지자

수능 끝나거든 좀 홀가분해지자 권영상 목요일인 오늘, 수능일이다. 수능 수험생들이라면 지금쯤 수험장에서 문제 풀이에 몰두하고 있겠다. 이른 아침 집을 떠나와 제 시간에 도착한 학생들이 대부분이겠다. 그러나 멀쩡히 가던 길도 이런 날이면 버스를 잘못 타거나 역방향으로 전철을 타고 갈 때가 있다. 가다가 ‘어, 이게 아닌데, 아닌데’ 하며 허겁지겁 전철을 바꾸어 타거나 택시를 잡아타고 온 학생도 있을 테다. 전철이나 버스를 바꾸어 타고 오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오늘 시험 꽝이겠구나’, ‘대학은 내년에나 가자,’ 그러지는 않았을까. 어쩌면 긴장이 풀리는 자신을 비난했을지 모른다. 도대체, 꼭 이런 순간에 왜 이러는 거야! 하고. 어쨌든 지금쯤은 벌렁거리던 가슴을 진정시키고 평온한 마음을 되찾았기를 바란다...

꺼질 줄 모르는 유미희 시인의 동심

꺼질 줄 모르는 유미희 시인의 동심 권영상 유미희 시인이야 말 안 해도 동시 잘 쓰신다는 거 다 아시죠. 연필시문학상 제 2회 수상자이셨죠. 그 무렵이 동시가 한창 꽃 피던 때가 아닌가 해요. 시에 임하시는 자세가 반듯하고, 현실을 보시는 마음이 살뜰한 것도 유 시인의 꼼꼼하신 성미 탓이 아닌가 합니다. 서산에 일이 있어 내려갔다가 이정록 시인을 만나 그 저녁에 뜻하지 않게 유미희 시인을 보았죠. 셋이 함께 저녁 식사를 하던 일이 어제 일처럼 떠오르네요. 그때도 우리 유미희 시인은 시 이야기를 할 때면 표정이 진지하고 반듯했죠. 7.8년은 됐을 적의 일입니다. 모 출판사에 동시집 를 내고 아마 한 일 년쯤 지난 뒤였을 거예요, 문예진흥기금을 지원받은 유미희 시인이 동시집 내준다는 곳에서 펑크 나는 바람에..

문학비평 2023.11.12

지갑을 잃어버렸다

지갑을 잃어버렸다 권영상 지갑을 잃어버렸다. 집에 돌아와 저녁 식사를 끝낸 뒤에야 알았다. 오후 2시쯤 가을 나들이 겸 차를 몰아 30분 거리에 있는 고찰에 갔었다. 지난해에도 갔었지만 그 절의 불타는 듯한 단풍과 잘 단장해 놓은 가을꽃 풍치가 그리웠다. 무엇보다 그 댁 부처님과 주렁주렁 달려 있을 감나무 감들이 눈에 선했다. 노란 은행나무 길 끝의 일주문을 들어서고, 천왕문을 들어서고, 가벼이 대웅전에 들어가 부처님을 뵙고, 절마당 벤치에 앉아 이울어가는 가을 소풍을 즐겼다. 그때 가을꽃 곁에 앉아 꽃들과 놀았는데 그 사이 바지 뒷주머니에 넣은 지갑이 빠져 나간 모양이었다. “절에다 지갑을 떨어뜨리고 온 것 같아.” 나는 결국 아내에게 그 말을 했다. “걱정 말어. 절에서 잃어버렸으니 부처님이 잘 돌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