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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을을 사랑했다

나는 가을을 사랑했다 권영상 가을을 사랑했다. 그때 나는 중 2 였고, 첫사랑이었다. 우리가 만난 건 엄마 때문이었다. 엄마는 내가 중2 때 병명도 모르는 상태로 병원에 장기 입원했다. 아무 문제없던 나의 일상이 하루아침에 헝클어졌다. 내가 살고 있는 곳은 시골이었고, 엄마가 입원해 있는 병원은 내가 살고 있는 지역의 중심지에 있었다. 나는 학교를 마치면 집으로 오는 게 아니라 엄마가 입원해 있는 병원으로 갔다. 그리고 저녁 무렵 4킬로미터가 넘는 집으로 혼자 돌아왔다. 내가 가을을 만난 건 그때였다. 물론 그 이전에도 만난 적은 있었지만 우리는 서로 스쳐지나가는 사이였다. 손을 잡거나 대화를 나눈 적도 없었고, 무엇보다 서로에 대해 알고 싶은 궁금함이 없었다. 그러나 엄마가 입원한 그때는 달랐다. 세상..

양을 만났죠

양을 만났죠 권영상 양을 만났죠. 잠이 안 올 때 이불 속에서 세던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 양 세 마리, 양 네 마리, 양 다섯 마리....... 그 양들을 여기 대관령 목장에서 만났죠. 밤마다 만난 양들이어서 양들은 멀리서도 나를 얼른 알아보고 달려왔죠. 나는 잠이 안 오는 날의 밤처럼 양들을 세었죠.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 양 세 마리, 양 네 마리, 양 다섯 마리, 양 여섯 마리...... 나는 그만 스르르 잠에 들려고 하죠. 풀밭에서의 낮잠 달콤하겠죠. 계간지 2023년 겨울호

감잎 가을 선물

감잎 가을 선물 권영상 아내가 참여한 미술전이 끝났다. 작품을 회수해 온 아내가 선물이라며 전시작품 도록을 내밀었다. 전시장이 코앞인 데도 못 가봤다. 예상치 못한 독감에 걸렸다. 날마다 아침에는 8시에 산에 오르고, 밤에는 9시에 걷기 길에 올라 한 시간을 걷는다. 딴엔 그걸 커다란 운동이라 믿어선지 병원에 안 가고 지금 닷새를 버티고 있는 중이다. “잘 찾아봐. 당신에게 줄 가을 선물을 숨겨놨어!” 그제야 나는 책갈피에 삐죽 나온 가을 빛깔을 쏙 잡아당겼다. 빨갛게 익은 감잎 두 장이 나왔다. 순간 예술의 전당 마당에 서 있는 감나무들이 떠올랐고, 이 감잎은 그들의 가을 분신임을 알았다. 들여다 볼수록 가을이 곱다. 감잎을 만져보는 손끝이 촉촉하다. 가을물이 손끝에 묻어날 것만 같다. 감잎이 만들어내..

야! 무지개 떴다

야! 무지개 떴다 권영상 아침에 그친 비가 점심 무렵에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가을엔 비가 좀 부족하다 해야 하는데 어찌된 건지 여름부터 비가 많다. 온다던 태풍이 오지 않았을 뿐, 가을비는 무더기비처럼 거세게 내린다. 날이 좀 들 것 같아 대파밭 북을 주고 돌아서면 놀리듯이 비가 내렸다. 고랑에서 긁어올린 흙 속 유기물을 비가 씻어내리는 것도 문제지만 비에 파밭골이 무너진 걸 보면 남루하다. 주인 없는 밭 같아 비가 뜸하면 또 비 올 줄 알면서도 파밭의 북을 준다. 오후 늦게 비가 뜸하자, 나는 괭이를 들고 또 파밭에 들어섰다. 파밭이래 봐야 모두 여섯 골. 김장 파 넉넉히 드리겠다고 벌써 여기저기에 말해 뒀다. 지난해는 파 농사가 잘 돼 파를 나누어 드리는 내 마음이 뿌듯했다. 물론 그때에도 나는‘내..

토끼풀 손목시계

토끼풀 손목시계 권영상 토끼풀이 힘을 합쳐 시계 가게를 열었어요. 지금 들판엔 풀꽃시계를 만들기에 딱 좋은 토끼풀 꽃이 한창입니다. 풀꽃시계를 만들면 손목에 직접 차시거나 좋아하는 분에게 채워드리실 거죠? 너무 어려 아직 사랑이 뭔지 모른다거나 너무 나이가 많아 사랑이 뭔지 잘 아는 분들이 선호하는 토끼풀꽃 시계. 점심을 끝내거든 곧장 토끼풀밭으로 나오세요. 토끼랑 함께. 출간 예정 동시집 수록

비 오는 날의 발자국

비 오는 날의 발자국 권영상 시멘트 길 위에 찍어놓고 간 누군가의 발자국. 그 발자국에 가을 빗물이 고인다. 발자국을 두고 간 그 사람은 어디 살고 있을까. 지금 그의 양말이 고요히 빗물에 젖고 있을지 모르겠다. 발이 축축해지는 것 같아 자꾸 발을 문질러주고 있을지 모르겠다. 가을비 오는 날 내 발도 거리로 나가고 싶어 한다. 어쩐지 양말이 젖는 것 같다. 2023년 겨울호

가을이 익고 있다

가을이 익고 있다 권영상 서울행 버스정류장에 아내를 내려주고, 나는 마트 앞에 차를 댔다. 식품 몇 가지를 사 가지고 차에 오르려다 다시 내렸다. 가을볕이 너무 좋아 바로 집으로 들어가기 아쉬웠다. 차를 두고, 가까이에 있는 개울을 향했다. 청미천이다. 개울 안에 시멘트로 만든 다리가 있다. 징검다리처럼 나트막하다. 노란 갈볕을 받으며 그 다리를 건너고 싶었다. 천변 양켠에 무성하게 자란 갈숲. 갈숲 안쪽에 펀하게 개울물이 흐른다. 다리를 건넌다. 그제야 못 듣던 개울물 소리가 철철철 요란하다. 발을 멈춘다. 물소리를 듣는다. 머릿속이 물소리처럼 철철철 살아나는 느낌이다. 웬만한 개울에서 들을 수 없는 큰 물소리다. 굽이쳐 흐르는 물결에 가을볕이 쏟아져 반짝인다. 물속을 들여다보니 개울바닥이 온통 굵은 ..

깜빡

깜빡 권영상 바쁘다 보면 누구나 깜빡할 때가 있죠. 꽃씨들도 깜빡 봄을 잊고 한 해를 그냥 넘기는 일, 부지기수죠. 제가 앵무새인 걸 깜빡 잊고 안녕, 잘 다녀와! 그렇게 사람처럼 말하는 앵무새들, 알고 보면 많죠. 초승달마저 때로는 제가 쪽배인 줄 알고 깜빡, 개울물 위를 동실동실 떠다니는 거 다들 보셨죠? 깜빡 한다고 괴로워 마세요. 일요일 아침을 깜빡 월요일 아침으로 착각해 서둘러 일어나던 일. 누구나 그런 일 다 있죠. 2023년 동시 재능기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