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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보 알바 봄바람

초보 알바 봄바람 권영상 나는 뭔가 일하고 싶었죠. 혼자 마을로 내려와 골목길을 지날 때 음식점 유리창에 붙은 광고지를 보았죠. ‘초보 알바 환영’ 문을 두드리자 빠꼼이 주인이 문을 열어주었죠. 나는 가볍게 들어섰고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일을 찾아했죠. 우선 눅눅한 음식점 안을 한 바퀴 휘익, 돌았죠. 젖은 식탁을 뽀독뽀독 닦았죠. 창가 화분의 꽃망울을 톡톡톡 피웠죠. 나를 지켜보던 사람들이 소리쳤죠. 아, 산뜻해. 알바가 바뀌었어! 나는 초보 알바, 봄바람이죠. 2024년 3월호

꽃씨를 보내는 사람

꽃씨를 보내는 사람 권영상 그분이 꽃씨 편지를 보내왔다. 하얀 편지 봉투를 여니, 그 안에 관공서에서 쓰는 질기고 얇은 노란 봉투가 또 나오고, 그 안에 눈에 익는 접시꽃 꽃 씨앗 십여 개가 들어 있다. 6.7년 전, 그때 그분으로부터 직접 받아본 그 꽃씨다. 그때 나는 그 접시꽃 씨를 안성 마당가에 심어놓고 여름 한철 그 꽃의 소박한 매력에 젖은 적이 있다. 첫해는 꽃이 피지 않고 그 이듬해부터 꽃이 핀다는 것도 그때 알았다. 꽃씨 봉투를 기울여 손바닥에 꽃씨를 받는다. 흔하다면 흔하고 수수하다면 수수한 꽃씨다. 무엇보다 이걸 주변 사람에게 보낼 줄 아시는 그분 마음이 고맙다. 대수롭지 않아 보이지만 이걸 이렇게 보내는 일이란 그리 쉬운 게 아니다. 그러려면 어느 날 꽃씨를 받고, 햇볕에 말리고, 문방..

먼 데를 바라보는 일

먼 데를 바라보는 일 권영상 다락방은 정말이지 별 용도 없이 지어진 것 같다. 여름엔 너무 덥다. 그런 반면 겨울은 너무 춥다. 가뜩이나 다락방으로 연결된 온수 배관 파이프가 어느 추운 해 동파되는 바람에 아예 그 지점을 절단해 버렸다. 그러니 더우면 더워서, 추우면 추워서 다락방에 올라가지 않는다. 암만 생각해도 다락방은 별로 쓸모가 없다. 이 다락방을 왜 만들었는지 이 집을 지은 목수를 한때 탓했다, 그런데 가끔 다락방 발코니에 나가 먼 곳을 바라보면서 비로소 그 까닭을 조금씩 알아간다. 눈앞에 드러나는 논벌과 그 논벌 끝 비스듬한 산 언덕, 4월이면 복숭아꽃으로 붉게 물드는 그 산 언덕 과수원. 여기서 3킬로미터는 되겠다. 과수원 너머엔 첩첩이 산이고, 그 어느 먼 산엔 파란색 물류센터가 보인다. ..

세상을 보여주던 방솔나무

세상을 보여주던 방솔나무 권영상 고향에 가면 지금도 있다. 방솔나무. 두 아름드리는 될 성 싶다. 보통 소나무들처럼 미끈하게 위를 향해 뻗어 오른 게 아니라 어느 쯤에서 사방으로 가지를 펴 맷방석 같이 평평하게 얽혀 있다. 그 위에 올라가 눕는다 해도 전혀 발가락 하나 빠지지 않을 만큼 탄탄하다. 방솔나무는 마을의 뒤편, 호수가 펀하게 보이는 곳에 서 있다. 서 있는 방향이 마을의 북쪽이다. 정확하게 북쪽인지 모르겠으나 그쪽 방위를 가리키는 소나무라 하여 아마 방솔나무라 부른 것 같다. 나무는 7.80여년 생, 우람하다. 근데 그 나무를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서울에서 만나고 있다. 나무는 모 제약회사의 개방된 뜰 마당에 서 있다. 나는 아침이면 출근삼아 동네 산을 찾는데 도중에 남부순환로 건널목을 건너게..

아침 미닫이문 여는 소리

아침 미닫이문 여는 소리 권영상 오전 여섯 시 반쯤, 다르르, 울리는 미닫이문 소리에 긴 잠에서 눈을 뜬다. 겨울이라 그 무렵의 방안은 아직 어둑신하다. 새벽이라면 아직 새벽이고 아침이라면 이른 아침인 겨울날이다. 나는 방안 벽에 걸린 시계를 본다. 예의 그 시각이다. 여섯 시 반경. 미닫이문 여는 소리는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사는 아파트 옆집에서 나는 소리이다. 이때면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 댁의 누군가가 잠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연다. 밤사이 방 안 공기를 내보내고, 서늘한 새 공기를 받아들이려는 모양이다. 다르르, 창호문 바퀴가 레일을 따라 굴러가는 소리에 방안도 울리고 내 마음도 울린다. 방금 눈을 떴으니 잡념 하나 있을 리 없는 텅 빈 내 몸이 고요히 울린다. 그 소리는 바람처럼 가벼우면서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