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감자 초록감자 권영상 감자가 감자바구니에서 뛰쳐나갔다. 감자밭에 오래 묻혀 살던 감자에겐 여행이 필요했다. 며칠 뒤, 나는 감자를 만나러 다시 그곳에 갔다. 감자는 몰라볼 만큼 변해 있었다. 온몸이 낯선 초록이었다. 깜짝 놀라는 나를 보고 감자가 말했다. 여행이 나를 새로운 모습으로 바꾸어 놓았어. 2024년 봄호 내동시 참깨동시 2024.02.19
초보 알바 봄바람 초보 알바 봄바람 권영상 나는 뭔가 일하고 싶었죠. 혼자 마을로 내려와 골목길을 지날 때 음식점 유리창에 붙은 광고지를 보았죠. ‘초보 알바 환영’ 문을 두드리자 빠꼼이 주인이 문을 열어주었죠. 나는 가볍게 들어섰고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일을 찾아했죠. 우선 눅눅한 음식점 안을 한 바퀴 휘익, 돌았죠. 젖은 식탁을 뽀독뽀독 닦았죠. 창가 화분의 꽃망울을 톡톡톡 피웠죠. 나를 지켜보던 사람들이 소리쳤죠. 아, 산뜻해. 알바가 바뀌었어! 나는 초보 알바, 봄바람이죠. 2024년 3월호 내동시 참깨동시 2024.02.06
비 온 뒤 비 온 뒤 권영상 비 온 뒤 개울물이 반짝인다. 비 온 뒤 참나무숲이 반짝인다. 비 온 뒤 햇살이 금실처럼 반짝인다. 비 온 뒤 밤별이 유리쪽처럼 반짝인다. 여기, 빗방울 하나 작지만 누군가를 빛나게 한다. 권영상 동시집 국민서관, 수록 내동시 참깨동시 2024.01.30
섭섭해 마요 섭섭해 마요 권영상 엄마 말은 안 들어도 친구 말은 잘 듣지! 엄마는 그게 늘 불만이죠. 암만 아니라 해도 사실 요즘 난 좀 그런 편이긴 하죠. 언젠가부터 내 귀는 바깥을 향해 자꾸 열리기 시작했죠. 하지만 엄마, 섭섭해 마요! 나의 세상이 커지고 있다는 뜻일 테니까요. 계간지 2024년 봄호 내동시 참깨동시 2024.01.23
추운 날 추운 날 권영상 아저씨가 한 분 앉아 있던 벤치에서 일어난다. 그 분이 앉았던 자리에 나뭇잎 한 장 푸르르 떨어진다. 온기를 느끼고 싶은 모양이다. 도르르 몸을 말고 눕는다. 계간 2024년 봄호 내동시 참깨동시 2024.01.23
꼿꼿한 비 꼿꼿한 비 권영상 창밖에 비 내리고 있다. 선 채 꼿꼿하게. 꼿꼿하게 내리는 빗방울을 받아들고 나무들이 꼿꼿하게 일어선다. 가끔 나무가 힘들어 누우려할 때면 비 내린다. 금을 내려긋 듯 꼿꼿하게. 꼿꼿이 일어서는 일은 힘들다. 그래서 잊을만 하면 비 온다. 꼿꼿하게. 2024년 봄호 내동시 참깨동시 2024.01.18
권영상 '상상 동시가게' 연재동시 4회 권영상의 '상상 동시 가게' 연재동시 4회 16. 햇빛을 빌려드려요 겨울을 코앞에 두고 꽃 피우는 민들레에게 모자라는 햇빛을 빌려드립니다. 일찍 겨울잠을 자러 가느라 미처 다 쓰지 못한 흰 곰들의 햇빛이 조금 남아 있습니다. 연락주시면 빌려 쓰실 수 있습니다. -햇빛 돌려쓰기 어머니 모임 17. 첫눈 배달 아침 문을 여니 뜰마당에 배달이 와 있다. 엄마, 배달이 왔어요! 나는 소리치며 달려나가 세상에서 가장 큰 배달 상자를 연다. 하늘이 보낸 희고 깨끗한 첫눈. 첫눈을 꺼내어 만져도 보고 뭉쳐도 보고 내 꿈이 가는 곳까지 멀리 던져도 보고 그리고 내가 바라던 눈사람을 뜰마당에 오뚝 만들어 세운다. 언제 보내주시려나? 하고 기다리던 내 마음을 하늘이 아셨나 보다. 소복소복 보내온 첫눈 배달. 18. 눈사람.. 내동시 참깨동시 2024.01.13
내 마음이 조용해질 때 내 마음이 조용해질 때 권영상 아침이다. 세숫물 안에서 만나는 사람 두 손을 세숫물에 담그면 그 사람은 달아난다. 나는 여기 남아 있는데 그는 달아나 세숫물 밖으로 사라진다. 엄마, 이걸 봐요. 그 사람이 없어졌어요. 그럼, 한참을 기다리거라. 네 마음이 맑아질 때 다시 돌아올 테다, 권영상 동시집 미리내 1996 수록 내동시 참깨동시 2024.01.08
네가 내게 네가 내게 권영상 네가 내게 버찌 하나를 건넬 때 나는 벌써 네게 줄 무언가를 생각한다. 내가 네게 꽃잎 한 장을 건넸을 때 네가 내게 다정한 웃음을 주었듯이. 권영상 동시집 미리내 1996 수록 내동시 참깨동시 2024.0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