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동시 참깨동시 488

봄의 손

봄의 손 권영상 봄은 봉자언니처럼 맡은 일을 척척 해낸다. 텃밭 상추씨를 제 날짜에 맞추어 딱딱 돋아나게 하고 밭둑 민들레를 찾아내어 아침밥 시간에 맞게 딱딱 꽃 피운다. 마을 벚나무들에게도 일일이 연락해 늦지 않게 꽃 피울 시간을 알려준다. 봄은 두 살 많은 봉자언니처럼 꼼꼼하다. 엄마가 대충 말해 놓고 가도 서툴지 않게 해내는 봉자언니처럼 봄은 척척 해낸다. 2023년 여름호

외계인 코

외계인 코 권영상 코는 먼 별에서 날아온 외계인이다. 두 개의 배기통을 달고 얼굴 한가운데에 쿵 불시착했다. 코에겐 별의 문명에 대한 자부심이 크다. 은근히 콧대가 높다. 어리석은 행동을 보면 서슴찮고 코웃음을 친다. 심하면 콧방귀를 뀐다. 즐거울 땐 룰루랄라 콧노래를 부른다. 코는 자부심만 강한 게 아니다. 아픈 이야기를 들으면 코끝이 시큰거려 그만 눈물을 쏟는다. 코가 외계인이라는 흔적이 또 하나 있다. 놀면 코가 노래진다. 동시마중 21호

소리 열매

소리 열매 권영상 여름이 오면 맴맴이라는 소리 열매가 열리기 시작한다. 그 노래하는 열매는 이 숲의 나라 나무마다 주렁주렁 열려 맴맴 맴부랑 굵어간다. 그 맛은 달콤하게 익는 오디 맛이 아니라 귀가 먹먹할 정도로 짜르르르, 그에게서 푸른 파도소리가 난다. 여름방학이 오면 이 마을 어떤 아이들은 그물 아구리가 큰 장대를 들고 맴맴맴이라는 소리 열매를 살곰살곰 따러 다닌다. 2023년 여름호

권영상 '상상 동시 가게' 연재

가능성을 상상하는 재미 안녕하세요? 저희 ‘상상 동시 가게’가 취급하는 상품은 일반 가게가 취급하는 상품과는 조금 다릅니다. 현실적으로 사고 팔 수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지요. 그림자, 웃음, 눈물, 바퀴벌레 여행사의 과거로 가는 여행 상품권, 생각을 펼쳐 보이는 거울, 궁궐 지하에 있다는 도깨비마을 관광 등이 그런 상품들입니다. 이 세상에 있었으면 하는 것들 중에 없는 것들만 취급합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실현될지도 모를 가능성을 꿈꾸며 쓴 시들입니다. ‘코로나19’로 말미암아 우리는 지난 3 여년 동안 갇혀 살았고, 지금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느라 갑갑하고 지루한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이 동시들은 그 갑갑한 현실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의 산물입니다. ‘코로나19’는 우리에게 많은 변화를..

요즘 우리 할머니

요즘 우리 할머니 권영상 할머니 옷장 서랍을 연다. 하나 둘 사라지던 내 연필과 지우개가 거기서 나온다. 꽃삽이 나오고 그렇게 찾아도 없던 할머니 구두가 나온다. 할머니는 요즘 할머니의 세상을 서랍 속에 만들고 있다. 묵은 탁상달력, 빈 콜라병, 신으시던 양말, 믹스커피 봉지……. 요즘 할머니 세상이 점점 작아지고 있다. 서랍만해지고 있다. 2023년 봄호

신포도

신포도에 대하여 권영상 이솝우화 속에 살던 여우가 마을로 내려왔다. 그 사이 꽤 많이 늙어 보였다. 늦게나마 여우가 마을을 찾은 데는 뭔가 이유가 있을 듯했다. 잘 익은 포도를 따려다 못 따고 돌아설 때 여우가 했다는 이솝의 말을 나는 지금도 기억한다. 그러나 그건 솔직히 여우를 비겁하게 만든 이솝의 나쁜 거짓말이었다. 그 이후, 여우는 아무 까닭 없이 사람들로부터 조롱을 당하며 오늘에 이르렀다. 어쩌면 그때 그 일을 바로잡아 주기 위해 여우가 마을로 내려왔는지 모르겠다. 2023년 봄호

도깨비방망이 크기도 하지

도깨비방망이 크기도 하지 권영상 도깨비방망이 크기도 하지. 혼자서는 못 메지. 둘이 메어야지. 둘이서는 못 메지. 셋이 메어야지. 방망이 속에 금이 한 수레. 떡이 한 가마 집이 열두 채. 도깨비방망이는 무겁기도 하지. 셋이서는 못 메지. 넷이 메어야지. 넷이서는 못 메지. 다, 여, 일고, 여덜, 아오, 열 열이 메어야지. 권영상 동시집 사계절출판사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