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따라 못내 그리운 그날의 교실 오늘따라 못내 그리운 그날의 교실 권 영 상 소식도 없이 비가 내렸다. 가을날의 비 내리는 저녁 시간이 금방 진한 갈색 나무빛 어둠으로 변한다. 도서관을 나섰다. 우산도 없이 빗길을 내려서려니 괜히 망설여진다. 그러나 괜히 망설일 뿐이지 나로서는 더 다른 선택이 없었다. 비를 맞으.. 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2012.06.20
어머니가 주고 가신 먹과 벼루 어머니가 주고 가신 먹과 벼루 권 영 상 어머니께서는 절 보고 그러셨지요? 미안하다고. 부모가 자식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해도 되는지 모르겠네요. 그리고 제가 그런 말을 부모의 입을 통해 들어도 되는지도 모르겠어요. 어떻든 그날, 어머니가 제게 그런 말씀을 한 연유는 알고 있답니.. 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2012.06.20
대숲집 옥자 대숲집 옥자 권 영 상 우편물을 부치러 우체국에 들렀다가 그 길로 이천행 버스를 탔다. 16년 전, 이천에서도 버스로 꽤나 들어가는 시골학교에 나는 잠시 머무른 적이 있었다. 그 곳이 가끔은 자꾸 그리웠다. 그러나 찾아간 시골마을은 내 기억 속의 마을이 아니었다. 아파트도 들어섰고, .. 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2012.06.20
손수건 손수건 권 영 상 새로이 산 손수건은 곱고 깔끔하긴 하지만 눈물을 받아들이지 못하지요. 적어도 손수건이 손수건이려면 깔깔한 성질은 마땅히 버려야지요. 주머니에 손을 넣었을 때 손 안에 포근히 잡히는 엄마의 낡은 치맛자락 같은 부드러움. 손수건이 손수건이려면 그래야겠지요. 알.. 내동시 참깨동시 2012.06.20
내 마음이 조용해질 때 내 마음이 조용해질 때 권 영 상 아침마다 세숫물 안에서 만나는 사람 두 손을 세숫물에 담그면 그 사람은 달아난다. 나는 여기 남아 있는데 그는 달아나 세숫물 밖으로 사라진다. -엄마, 이걸 봐요. 그 사람이 없어졌어요. -그럼, 한참을 기다려라. 네 마음이 맑아질 때 다시 돌아올 테니. .. 내동시 참깨동시 2012.06.20
4월이 오면 4월이 오면 권 영 상 4월이 오면 마른 들판을 파랗게 색칠하는 보리처럼 나도 좀 달라져야지. 솜사탕처럼 벙그는 살구꽃 같이 나도 좀 꿈에 젖어 부풀어 봐야지. 봄비 내린 뒷날 개울을 마구 달리는 힘찬 개울물처럼 나도 좀 앞을 향해 달려봐야지. 오, 4월이 오면 좀 산뜻해져야지. 참나무 .. 내동시 참깨동시 2012.06.20
그간에 에미가 사묻 부끄러웟다 그간에 에미가 사묻 부끄러웟다 권 영 상 말하자면 나는 소년기와 청년기를 매우 힘들게 보냈다. 그게 꼭 어머니 탓이라고 할 수야 없지만 어쨌거나 나는 그 시절을 어머니의 손길 밖에서 컸다. 이런 저런 이유로 어머니는 내가 중학 2학년 무렵부터 무려 7년간을 병원 생활을 하셨다. .. 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2012.06.20
내 꿈은 이미 내 꿈은 이미 권영상 바람이 분다. 민들레 씨가 울타리를 타넘는다. -꿈은 가지고 떠나는 거니? 차돌멩이가 부러운 듯 물었다. -내 꿈은 이미 저쪽 들판에 가 있다구. 내동시 참깨동시 2012.06.20
아무리 크면 뭐하겠어 아무리 크면 뭐하겠어 권영상 산이 아무리 크다 해도 그 안에 옹달샘 하나는 있어야 산도 산이라 할 수 있지. 아무리 하늘이 크다 해도 그 안에 별 하나 없다면 하늘은 정말 하늘도 아니지. 들판이 아무리 크면 뭐하겠어. 그 안에 들꽃 한 송이 피지 않는다면 들판은 들판도 아니지. 정말이.. 내동시 참깨동시 2012.06.20
무게 무게 권 영 상 가만히 목덜미에 무게가 느껴진다. 누군가 나를 누른다. 손을 올려 그 ‘무게’를 집어내린다. 머리카락 한도막이다. 내 몸이 이 가벼운 무게에 못 견뎌 한다. 권영상 동시집 <실끝을 따라가면 뭐가 나오지>(국민서관) 중에서 내동시 참깨동시 2012.06.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