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간에 에미가 사묻 부끄러웟다
권 영 상
말하자면 나는 소년기와 청년기를 매우 힘들게 보냈다.
그게 꼭 어머니 탓이라고 할 수야 없지만 어쨌거나 나는 그 시절을 어머니의 손길 밖에서 컸다.
이런 저런 이유로 어머니는 내가 중학 2학년 무렵부터 무려 7년간을 병원 생활을 하셨다.
지금도 그렇지만 35년 전, 그 당시에 시골 살림으로 오랫동안 입원을 한다는 건 예삿일이 아니다.
아버지는 전답을 팔아 병원비를 대고, 결국 그 것도 모자라 나는 고등학교에 진학을 하지 못했다.
3년을 폐인처럼 나는 떠돌았다.
그 시절, 어머니가 없는 빈집이란 두려운 공간이었다.
그래 그게 또 서럽고, 아주 많이 슬퍼서 나는 걸핏하면 술을 마셨고, 경포호수 주변을 배회했다. 술과 담배와, 그것만으로도 참을 수 없으면 나는 공사장을 찾아 질통을 메었다. 뭔가 나를 혹사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어머니를 살리시겠다는 일념 탓에 내게 관심을 둘 겨를도 없었다. 현대 의술로 병을 고치기 어렵다는 걸 아신 아버지는 깊은 고뇌 끝에 무당을 불렀다. 포항과 거진 또는 대진 등지에서 큰무당들은 매양 집을 찾아왔다. 그리고 그들은 늘 이른 저녁부터 굿당에 쓸 꽃을 일구고, 어둠이 깔리면 징을 치며 굿을 했다. 그게 부끄러운 나는 늘상 마을 밖을 떠돌았다. 목숨을 부지한다는 것이 얼마나 고되고, 그 목숨을 지켜 준다는 것조차 얼마나 치통처럼 고단한지 나는 그 시절에 어렴풋이 알았다.
떠돌이 의원들과 민간요법을 쓰는 이들은 또 매양 군식구들처럼 찾아 들어 사랑방을 그득 채웠다. 그들은 아침이면 인삼과 녹용이 든 약제를 지어 주고, 아버지는 그 약제를 들고 한방을 돌았다. 그래도 어머니의 병은 낫지 않았고, 아버지는 급기야 민간요법을 하는 이들의 말을 따랐다. 백 가지의 풀과 백 가지의 꽃과 백 집의 쌀을 모아 그걸로 밥을 지어먹으면 낫는다는.
아버지의 손에 끌려 나는 산과 들을 헤매며 꽃과 풀을 뜯어 모았고, 백 집의 쌀을 모았다. 그러는 사이에도 나는 끝내 학업을 다시 시작했고, 어머니는 병원에서 돌아나와 그러구도 다시 5,6년을 더 병석에 누워 있었다.
내가 스물 다섯이 넘어서야 어머니는 병석에서 일어나셨다.
무려 12년의 길고 긴 투병을 마치신 거다.
어머니를 일으켜 세우신 아버지는 임무를 마치고 떠나는 귀대병처럼 저쪽 먼세상으로 가셨다.
생각해 보면 어머니도 그러하지만 떠나신 당신 또한 고단한 생애를 사셨다.
20 여년이 많이 지난 재작년 겨울, 겨울을 서울에서 보내시라고 어머니를 모셔 온 적이 있었다.
분가한 막내의 집을 한번도 찾지 못하고 가신 아버지가 그리워 강릉이 추우니까 그런 구실로 구순이 가까운 어머니를 모시곤 했다. 그해 겨울도 어머니는 스무날을 머무시다 시골로 내려가셨다.
어머니가 가시고 난 그날 저녁이었다.
느닷없이 아내가 때에 절은 한지첩 하나를 내놓았다. 내가 내려가거든 애비한테 보이라던 어머니의 말과 함께.
나는 그저 대수롭잖게 아내가 펴놓은 한지첩을 내려다 봤다.
그걸 보는 순간, 애틋한 정으로 어머니를 대하지 못했던 나의 불찰이 너무나 후회스러웠다.
한지첩에서 나온 건 어머니가 출가해 오시기 전에 쓰셨다는 종지만한 벼루와 먹과 몽당붓이었다.
그리고 어머니가 나의 유년 때에 당신의 무릎에 나를 뉘이고 헤아릴 수 없이 들려주시던, 손수 필사하신 <박씨부인뎐>이었다.
읽어 주시고는 곱게 장롱 속에 넣어두시고, 두시고 하며 아끼시던 책이었다. 나는 찡해 오는 전율을 감추며 그것의 첫장을 넘겼다.
책갈피에 작은 편지 하나가 끼워져있었다.
'그간에 에미가 사묻 부끄러웟다'
그 글을 보자, 어머니에 대한 나의 꾹 막혔던 감정이 다시 북받쳤다.
산다는 게 대체 무엇인지, 피로 맺어진 인연이란 게 대체 얼마나 안쓰러운 것인지 그런 회한의 격정이 나를 뒤흔들었다.
어머니는 그간의 삶을 무엇으로든 갚아야지 갚아야지 하며 사셨던 게 분명하다.
생각할수록 인생이란 얼마나 서러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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