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오래된 꿈, 오동나무집

권영상 2012. 6. 19. 12:02

 

 

 

 

  

오래된 꿈, 오동나무집

            권 영 상 

 

 

아직도 고향에는 몇몇 연세 많은 분들이 계신다. 가끔 강릉 초당에 들르면 감자밭머리나 우차길에서 그분들을 만난다.

“안녕하세요? 아저씨.”

여든을 넘긴 할아버지들이지만 내가 어렸을 때 그분들은 내게 아저씨뻘이었다.

“누구신고?”

나는 반가워 인사를 하는데 안청이 부실한 그분들은 미처 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되묻는다.

 

“저 우출댁 넷째집 막네이.”

내가 그쯤에서 말을 마치면 그들은 ‘아아, 거 영윤씨 동생?’ 하며 고개를 끄덕이신다. 그런 식으로 그분들을 만나고 헤어질 때마다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 택호다. 우리 집엔 택호가 없다. 그냥 ‘우출댁 넷째집’이다.

우출댁은 위촌리에서 출가해 오신 할머니의 친정마을 이름을 딴 큰댁의 택호다. 할아버지는 네 분 아드님을 두셨다. 내게 둘째 백부 되시는 분은 큰댁 앞뜰 서향에 분가를 하셨고, 셋째 백부께서는 큰댁을 중심으로 뒤켠 서향에 분가 하셨다. 그리고 막내이며 넷째이신 우리 아버지는 큰댁 앞뜰 동향에 여덟 칸 집을 지어 분가해 나오셨다. 우리 마을은 큰댁을 중심으로 사는 작은 집성촌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큰백부님 계신 큰댁은 전답도 많았고 위세가 있었다. 그러다 보니 분가해 나온 백부님들은 모두 독립된 택호를 쓰지 못하셨다.

대개 여자를 얻으면 안주인의 고향을 택호로 쓰곤 했다. 밤골에서 시집을 오면 밤골집, 뇌닐에서 오면 뇌닐집, 사기막에서 오면 사기막집 등의 택호를 썼다. 그래서 모솔(池邊), 핸다리(白橋), 날밀(蘭谷), 배다리(船橋), 장두골(長德), 박다람(博月), 자리미(柄山), 어리미(幼山) 등의 지명을 택호로 많이 썼다. 그런데도 지체이신 아버지 형제분들은 ‘우출댁 둘째집’, ‘우출댁 셋째집’이었다. 그러니 자연 우리 집도 ‘우출댁 넷째집’이 되었다.

 

‘우출댁’의 위세가 상당해서 우리 마을뿐 아니라 근방에 사는 사람들도 ‘우출댁’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그런 탓에 어디에 가서도 나를 소개할 때면 늘 예의 그 ‘우출댁’을 들먹여야 했다. 당시만 해도 나를 소개하는 방식이 지금과 달랐다. 지금은 자신의 직장이나 주소를 대면 그뿐이지만 농경사회였던 당시는 일 개인 보다는 소속된 가문을 중시했다. 그러다 보니 택호가 필요했다. 택호에는 나의 조부모, 나의 부모, 나의 형제자매가 함축되어 있다. 그러니까 나라는 존재는 늘 그 안의 많은 요소들 중의 하나로 존재했다. 어쨌거나 나를 소개하는 데는 이 방식이 아주 편했다. 무엇보다 소통이 빨랐고, 그 그늘(택호)의 덕을 볼 수도 있었다.

 

그렇기는 해도 나는 그게 못마땅했다.

어렸을 적부터 이 ‘우출댁 넷째집’이라는 게 싫었다. 종속이나 예속되는 느낌이었다. 가뜩이나 막내이신 아버지는 큰댁과 손위 형님들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셨다.

“우리 집만의 독립된 택호가 따로 필요해요.”

나는 아버지에게 그 말씀을 드렸다.

“가당치도 않은.”

아버지는 일언지하에 내 말을 막았다.

 

네 형제분의 막내이신 아버지와, 아버지가 낳으신 6남매 막내인 나는 달라도 많이 달랐다. 아버지는 순종적이셨고, 나는 저항적이었다.

“오동나무집이라는 택호 어때요? 아버지.”

“.......”

아버지는 쩝, 하고 입을 다시셨다. 그 ‘쩝’ 속에는 내 말에 대한 공감도 없지 않아 있지 싶었다.

 

우리 집 마당귀에는 아름드리 오동나무가 있었다.

아버지께서 분가해 나올 그 무렵에 심으셨다는 오동나무다. 늦봄이면 오동나무 보라꽃 향기가 마당을 가득히 채웠다. 여름이면 그 오동나무 그늘에 앉아 방학숙제를 하고, 낮잠을 자고, 뭉깃뭉깃 피는 생풀 모깃불을 피워놓고 저녁을 먹었다. 가을 태풍이 오면 오동나무잎에 떨어지는 빗소리에 잠을 잘 수 없었다. 늦은 가을부터는 넓은 오동잎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우리가 성장해 타관에 가 직장생활을 할 때다.

가끔 고향집을 찾아가면 미리 기별을 들은 아버지는 그 오동나무 곁에 나와 서서 우리를 맞으셨다.

“오느냐.”

아버지 말씀은 언제나 단문이셨다.

아버지는 그렇게 단문처럼 복잡하지 않게 어머니를 위해 세상을 사시다가 돌아가셨다.

 

 

태풍 매미가 강릉지방을 강타하고 간 2003년.

고향집도 그 피해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허리에 오도록 물이 찼다. 한번 물에 잠기고 난 오래된 농가는 더욱 피해가 심했다. 집을 지키고 살던 큰조카는  결국 옛집을 허물고 새로 콘크리트 집을 지었다.

 

그렇게 해서 ‘우출댁 넷째집’은 영영 사라지고 말았다.

물론 집 마당귀에 서 있던 오동나무도 베어지고 말았다. 오동나무 섰던 자리를 찾아봤지만 그루터기조차 보이지 않았다. 허전했다. 아버지 어머니의 오랫동안 살아오신 자취를 송두리째 잃어버린 느낌이었다.

새로 잘 지었다는 현대식 집을 보고 서울로 돌아오던 날 나는 혼자 생각했다.

 

‘‘오동나무집’이라는 택호를 살리고 말리라.’

나는 아버지가 망설이셨던 그 택호를 살려 쓰고 싶었다. 그러나 아파트에 살고 있는 내가 그 꿈을 이루리라는 것은 그야말로 꿈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런데 한번 먹은 그 마음 탓인가.

그 일이 이루어졌다. 퇴직이 가까워 오자, 제대로 된 집 하나를 갖고 싶다는 생각이 마음 깊은 데서 울분처럼 일어났다. 지난 겨울부터 나는 그 ‘제대로 된 집 하나’를 위해 여주, 이천, 광주, 양평 등지를 찾아헤맸다. 오랜 노력 끝에 우연찮게도 이곳 안성 밤골 마을에 집 하나를 얻었다.

 

집을 구하자, 나는 제일 처음 어린 오동나무 한 그루를 뜰 앞에 소중히 심었다. 이렇게 해서 우리 집은 비로소 내가 그리던 ‘오동나무집’이 되었다. 비록 고향 강릉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는 해도 내 마음은 마치 아버지의 유산을 모두 물려받은 듯 뿌듯했다.

 

지금은 어린 묘목이지만 이 오동나무도 세월이 흐르면 그 옛날의 오동나무처럼 좋은 그늘을 만들어줄 테고, 우리들은 그 그늘 아래 배를 깔고 엎드려 책을 읽겠다. 그리고 거기서 늦은 저녁을 먹고, 밤에는 별을 세다가 잠이 들겠다.

“한데서 자지 말고 얼른 방에 들어가 자려무나.”

그러시던 아버지의 목소리가 어디선가 아련히 들리는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