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지금 아빠와 같은 방향으로 서 있어요

권영상 2012. 6. 20. 13:00

 

지금 아빠와 같은 방향으로 서 있어요

                       

                                                권 영 상 

 

 

 

 

 

저녁 무렵, 딸아이한테서 메시지가 왔다.

‘아빠 뒷베란다 문 열어봐’

딸아이가 하라는 대로 나는 뒷베란다로 나가 창을 열었다.

노을이다. 마을의 지붕들 위로 주홍빛 노을이 선연히 물들고 있었다. 평소에는 모르고 지내던 하늘의 크기도 노을이 피면 안다. 자연이 다 그렇듯 거대하다.

 

노을에 붉게 물든 얼굴로 이번에는 내가 딸아이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너도 보고 있냐’

짧은 신호음과 함께 대답이 금방 돌아 왔다.

‘지금 아빠와 같은 방향으로 서 있어요’

화면에 찍힌 메시지를 읽자니 괜히 마음이 울적해졌다.

 

이 커다란 도회의 어딘가에서 노을의 방향을 향해 서 있을 딸아이가 떠올랐다. 한길가 어느 보도에서, 빌딩의 어느 회랑에서, 아니면 서쪽으로난 카페의 어느 창가에서 내게 문자를 보내며 서 있을 딸아이가. 고향을 먼데 두고 나는 이 도회에 와 산다. 혈육이라곤 간신히 딸아이 하나뿐이다.

 

딸아이가 고등학교를 다닐 때만 해도 우리들의 방향은 한 곳이었다.

누구나 다 겪어내는 대학입시였다.

그러나 대학에 들어가자, 딸아이는 나의 도움없이 제 스스로 세상의 길을 함부로 걸어다녔다. 우리들의 방향은 그 때부터 엇갈리기 시작했다. 아버지인 내가 성숙한 딸아이의 걸음의 방향을 바꾸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 탓에 ‘지금 아빠와 같은 방향으로 서 있다’는 메시지는 나를 더욱 찡하게 했다.

 

나는 베란다 문에 어깨를 기대었다.

노을이 뜨고 지는 이 순간이 비록 짧다하더라도 이 짧은 순간만이라도 딸아이와 같은 방향으로 서 있다는 것이 슬프도록 아름다웠다.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같은 방향을 꿈꾸기를 바라며 내게 문자를 보내오는 딸아이가 고마웠다.

‘사랑해’

복잡한 도회의 어느 거리를 걷고 있을 딸아이를 향해 나는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

‘저도 사랑해요’

 짤막한 신호음과 함께 또다시 딸아이의 메시지가 저쪽 붉은 노을 속에서 웃음처럼 날아왔다. 손안에 잡힌 문자를 다시 또 다시 읽는다.

 

이 세상에 와 내가 던져놓은 혈육 한 점의 가슴에서 날아온 문자.

딸아이가 보내온 문자는 내 손안에 있지만 이제 딸아이의, 세상으로 향하는 걸음의 방향은 더 어쩔 수 없다.

쉰 나이의 중반을 들어서면서도 나는 아직도 내게 길을 묻는다. 너는 이 세상에 와 무엇을 지어놓고, 지금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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